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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논리, 기품 “정언적 이다”를 고집하는 글, 그러니까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읽는 이를 가르치게 되고 마는, 교화성을 품을 수밖에 없는 글”은 그 담론의 단언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일정한 공격성의 향기를 품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길을 걷게 될 경우라면, 이러한 글도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유형의 글들은 “정언적 이다”의 꼴에 여전히 머물고 이 꼴을 여전히 취하지만, “정언적 이다”의 철창을 바수어버린 경우인 것. 이를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정언적 이다를 넘어선 정언적 이다”라고 부르면 좋을까. 첫째의 경우는 그 글이 철학적 깊이를 확보할 때다. 이러한 “이다”는 우리를 깨우치면서 또 우리가 더 많은 질문으로 나아가게 하기.. 2010. 1. 6.
가난이 아니라 풍요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만큼 이 시대에 긴요한 것은 없을 터이나, 예서 ‘가난’이라는 표현만큼은 다른 걸로 대체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본래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人心本自樂)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누리고 그곳으로 향해가는 마음은 보편적이고 상존하는 것이어서, 재앙자본주의 시대에 대안적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다름 아닌 바로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가난’이라는 말은 이러한, 이상을 찾아가는 마음, 즐거움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本來心의 지향과 상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家難’이라는 말에서 나온 듯하다. 다시 말해 집이 어렵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고,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살림살이가 딱하고 어려운 상태.” 가난하다는 국어사전에.. 2010. 1. 6.
이십대의 이명박 이명박이 (대통령) 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또 역사가 10년 전으로 거꾸로 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 보야 할 일은, 얼마나 한국의 이십대가 이명박을 지지하느냐 일 것이다. 이들은 1977년 - 1987년 태생인데, 대개 이십대 중반에서 삼십 즈음에 아이를 낳았다는 가정 하에, 거칠게 수치를 계산해보면, 이들의 부모세대는 대개는 1947년 - 1962년 태생인 이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부모세대는 한국전쟁을 겪었더라도 코흘리개로 겪어서, 그 체험을 뼈저리게 하지 못한 세대일 것이고, 대개 그들의 십대에 박정희 정권을 체험한 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빠르게는 이들은 이십대에, 늦게는 삼십대에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권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우.. 2010. 1. 6.
심미안과 채식 예술에 가짜/진짜는 없다. 오직 졸품/절품이 있을 뿐이다. 이 몸이 옛날부터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졸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졸품을 생산한 이가 아니라, 졸품에 대한 세인들의 터무니없는 열광이었다. 이 열광과 졸품의 재생산, 즉 존속은 한통속이다. 열광이 없다면 졸품도 없는 것이다. 절품인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대중의, 다수의, 열광이 없어도, 이것은 살아남는다. 심미안이란 말은 위험한 말이긴 하나, 이와 비슷한 것, 그리고 우리가 양심과 자유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이러한 작품들은 살아남는다. 고기의 소비와 생산도, 그 순환체제에서 소비자와 생산자는 한통속이라는 점에서, 졸품의 소비와 생산과 유사한지 모른다. 내가 졸품 소비를 그만한다고 해서, 졸품 생산-소비체제가 무너질 리는 만무할 터이다... 2010. 1. 6.
가난 왜 ‘가난’이란 말을 고집할까. 누차 이야기해온 대로, 이 말을 고집하는 한, (그 앞에 고르게, 공생공락의, 이 아니라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이 말로서 뜻하려는 바가 대중화되거나 보편화될 가능성은 그만큼 적다. 누차 이야기해온 대로, 가난을 추구하는 이는 이 세계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늘늘 풍요이지, 가난이 아니다. 이 말에 물론 이런 답이 올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지금 식으로의 풍요 추구가 파국을 불러오고 있고 필연적으로 파괴를 동반해왔다는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서의 말이 가난이 될 수는 없다. 다른 식의 풍요, 새로운 식의 풍요, 이 시대에 가능한 유일한 형식으로서의 풍요라 말해야 한다. 2008. 6. 13. 2010. 1. 5.
찾아야 하는 존재의 가벼움 안과 밖처럼 무거움과 가벼움도 대립하는 것으로만 볼 수 없는 두 성질이다. 가령 차를 마실 때 우리는 가벼움을 느끼는가 아니면 무거움을 느끼는가. 그 때, 차와 우리가 합일할 때, 차와 우리 존재가 하나 될 때, 고요로이 휘돌더니 잠잠해져서는 저의 깊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거기 休居하는 액체처럼 그렇게 내 맘은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 마침내 나의 여러 층위, 나의 여러 시간이 단일화되고 마는 그 때, 마음과 머리는 가벼워지지만, 엉덩이와 말은 무거워진다. 무거워진 말과 엉덩이는 가벼워진 마음과 머리, 가벼워진 존재의 다른 이름이다. 차 한 잔의 깊이 속에서, 한쪽의 무거움이 한쪽의 가벼움을, 또 한쪽의 가벼움은 다른 한쪽의 무거움을 지탱시켜주고 존립시켜준다. 때 벗어 싱싱한 알몸 침묵의 알몸으로 살자.. 2010.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