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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아니라 풍요

by 유동나무 2010. 1. 6.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만큼 이 시대에 긴요한 것은 없을 터이나, 예서 ‘가난’이라는 표현만큼은 다른 걸로 대체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본래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人心本自樂)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누리고 그곳으로 향해가는 마음은 보편적이고 상존하는 것이어서, 재앙자본주의 시대에 대안적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다름 아닌 바로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가난’이라는 말은 이러한, 이상을 찾아가는 마음, 즐거움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本來心의 지향과 상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家難’이라는 말에서 나온 듯하다. 다시 말해 집이 어렵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고,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살림살이가 딱하고 어려운 상태.”  가난하다는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다. “생활이 어렵고 딱하다.” [성서]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 있나니 천국의 저희의 것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하여간 이러한 오역이, 가난이라는 간단한 말을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이 문맥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은 “마음에 욕심이 없는 자는”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안이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을 “가난한”으로 잘못 쓴 것이다. 그러나 전자, 즉 [성서]에 기록된, 예수가 했던 말은 결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 욕심이 없다, 無慾하다’는 것으로, 만인이 그 본래심으로부터 구하고 있는 천상의 양식이며 즐거움을 바라는 우리에게 한없이 긍정되는 것이지만, 후자인 ‘가난하다는 것’에는 한없이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딱한 것이요, 즐겁지 않은 것이요, 기분을 해치는 것이요, 슬픈 것이요, 마음을 옥죄는 것이요, 회피해야 하는 것이요,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천 년을 넘게 내려온 ‘가난’이라는 말의 전통이요, 말의 아우라의 전통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삶의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면서 ‘가난하자’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所以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고 이해되는 전통에 대한, 혹은 그 중요성에 대한 몰이해 혹은 경시에서 나온 것이다. 혹은 ‘가난하다’는 것을 ‘비어 있는 것’으로 잘못 여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 말한 대로 [성서]의 한글번역자들의 커다란 실수가 작용했다.

 

 

‘풍요’, 혹은 ‘풍요롭다’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바라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우리는 년년세세를 거쳐 물의 풍요, 대지의 풍요, 숲의 풍요, 비의 풍요, 과실의 풍요, 낙엽의 풍요, 아이들의 풍요, 계절의 풍요, 마음의 풍요, 정신의 풍요, 문화의 풍요, 음악의 풍요를 바라왔다.

 

 

그렇기는 하나, 물질의 풍요를 확보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탐욕, 탐착심은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 큰 장애가 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즐거운 기분을 자아내는 어떤 물질적 구비의 상태는 즐거운 기분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 “구비”에 정신이 팔리고 마는 것은 즐거운 기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즐거움을 망치는 해악 중 최고 해악, 장애 중 최고 장애인 것이다. 따라서 즐거움을 본래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과 이 마음에 따라 나아가는 우리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어 인생의 和樂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물질적 풍요를 향한 일체의 탐착심과 적극적으로 격절하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아가 이 탐착심을 일으키고, 부추키고, 장려하고, 옹호하고, 가동시키는, 이러한 장려-옹호 행위 없이는 자기의 근본기반이 흔들리고 마는 일체의 말, 이데올로기, 인간, 관계, 네트워크, 기관, 체제와도 적극적으로 격절해야만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현대의 경험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소비자본주의, 쇼핑자본주의의 막강한 힘으로, 이 체제의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들의 웅웅거리는 소리처럼 우리들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광고와 ‘으스댐’의 말들, 소음들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것에 대한 적극적인 격절을, 격절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평화롭고 즐거운 삶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적인 삶, 올곧은 삶을 보장하는 열쇠라는 점을 담고자 하는 개념일 터이다. 그러나 앞서 암시한 바대로 우리가 반대해야 할 것은 ‘풍요’그 자체가 아니라 - 우리는 늘 정신의 빈곤이 아닌 정신의 풍요를 원하지 않는가! - ‘현대 소비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물질적 풍요’며, 이 ‘물질적 풍요를 가동시키는, 이 체제에 의해 이식되고 확산되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탐착의 욕망’인 것으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워야 할 것도 ‘가난’ 그 자체가 아닌, 물질에 대한 탐욕, 그리고 이 탐욕에 생산하는 체제와의 적극적이고 실존적인 격별의 태도, 소욕지족하는 태도인 것이고, 이 격별의 입장을 통한, 소욕지족하는 삶의 태도를 통한, 즐거움에의 새 길인 것이다.

 

 

 

소욕지족하여 樂樂하고 淸樂한 삶과 집안이 어려운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소욕지족하여 和樂平淡한 삶과 가난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물질은 남이 보기에 부족한 듯 보여도, 마음이 텅 비어 아무러한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자, 티끌만한 利慾에 대해서도 마음속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며, 마음은 가난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늘늘 풍요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 마음 늘늘 풍요에 탐욕과의 결별, 소욕지족을 통한 즐거움의 추구는, 이 시대의 조건에서는, 절대 절명의, 근간이 되는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것은 결국, 자발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가난’이 아니며, 또한 ‘물질적 풍요’는 더더욱 아니며, ‘한 차원 높은 차원의 풍요’, 어쩌면 ‘이 시대에 가능한 유일한 형식으로서의 풍요’인 것이다. ‘자발적인 가난’의 개념은 유효하고 긴요하고 절박한 것이나, 그 말만은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시대는 분명히 즐거움을 찾는 우리에게 근본주의자가 될 것을 요청한다. 그것이 먹는 것이든, 입는 것이든, 그 어떤 것이든, 구비 물품을 최소화함으로써, 쇼핑의 피로, 소비로서 생산의 만족을 대리 충족하는 바보짓, 으스댐의 추한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나 평화와 만족을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원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참다운 ‘좋은 있음’ (Well-being 이라는 말은 얼마나 매혹적인 말인가. 그런데 웰빙이라는 말은 얼마나 혐오스러운 말인가!) 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자 {양왕} 편에 나오는, 자열자의 부인은 자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듣건대, ‘道 있는 사람의 아내가 되면 다 편하게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었던 자열자는 정말로 ‘가난’에 시달렸을 터이다. 그리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자열자와 자열자 부인이 겪었을 정황에서 자유로운 이는 이 세계에 아무도 없을 터이다. 어느 정도가 소욕이고, 어느 정도가 과욕이냐 하는 근본 물음에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타인의 소비수준, 평균 소비수준 따위를 일러주는 통계자료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자열자와 같은 도인과 혼인할 정도의 격이라면 그 부인도 아무 상황에나 저러한 말들을 토해내지는 않았을 터. 소욕/과욕의 적정선을 묻는다면, 저러한 말들이 오가지 않을 정도라고 답하면 어떨까. 이는 너무 과한 것일까. 이 적정선이야 어떤 것이든, 물질적 소비량의 축소 없이, 물질적 소비 행위에 대한 태도의 변화 없이 “좋은 있음”을 이 시대에 구현할 길이 절대로 없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질소비욕망의 확대로 어떻게 Well-being 할 수 있단 말인가!

 

 

2007.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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