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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안과 채식

by 유동나무 2010. 1. 6.



예술에 가짜/진짜는 없다. 오직 졸품/절품이 있을 뿐이다. 이 몸이 옛날부터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졸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졸품을 생산한 이가 아니라, 졸품에 대한 세인들의 터무니없는 열광이었다. 이 열광과 졸품의 재생산, 즉 존속은 한통속이다. 열광이 없다면 졸품도 없는 것이다. 절품인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대중의, 다수의, 열광이 없어도, 이것은 살아남는다. 심미안이란 말은 위험한 말이긴 하나, 이와 비슷한 것, 그리고 우리가 양심과 자유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이러한 작품들은 살아남는다.

 

 


고기의 소비와 생산도, 그 순환체제에서 소비자와 생산자는 한통속이라는 점에서, 졸품의 소비와 생산과 유사한지 모른다. 내가 졸품 소비를 그만한다고 해서, 졸품 생산-소비체제가 무너질 리는 만무할 터이다. 마찬가지로 나 홀로 고기를 먹지 않겠다 해서, 이 결정과 행위가 그 소비-생산 체제에 어떤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졸품을 졸품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한 독자는 이제, 자기 안에서 엉성한 형태로나마 형성되기 시작한 심미안 탓에 점차 절품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한다. 왜 이것은 졸품이고 왜 저것은 절품인지에 대해 일정한 형식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안목과 심미적인 판단력 덕분에 이제 그의 세계에 절품은 점차 폭포수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와 똑같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의 그 결심은 적어도 그 결심을 한 당자에게는 유효하고 값어치 있다. 그이는 <야만을 동반하는 즐거움>의 체제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 야만과 가느다랗게, 그러나 분명히 잇닿아 있는 나쁜 업연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것이다. 이 몸의 생각엔, 이것은 분명 <즐거움>에 대한 심미안의 일정한 성숙을 반영한다. 보다 높은 수준의 작품에 눈을 뜨게 된 이가 그러하듯, 그이의 세계에는, 이제 보다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 폭포수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고기를 먹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야만을 동반하는 즐거움>인가, 왜 고기를 먹는 일이, 나쁜 업장을 쌓는 일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 몸보다는, Youtube 가, 혹은 육류의 생산과 가공 공정을 다룬 현장보고서와 현장보고 필름이 더 잘 대답해 줄 것이다.

 


만일 어떤 즐거움의 원천에 즐겁지 않은 것이 깃들어 있다면, 그 즐거움은 과연 온당한 의미에서 즐거움일 수 있을까. 왜 우리는 더 좋은 것을 놓아두고, 그보다는 못한 덜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최상의 즐거움을 선택하기를 포기하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약간 덜 즐거운 일을 선택해야 하는가. 우리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면, 그것은 즐거움을 포기하기 위해서 아니라,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인 것이다. 무엇이 즐거움인가. 

 

 

 

혹자는, 반발심에 의해,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할지 모르겠다. “인간은 본래 야만적이다. 식물을 먹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동물을 먹는 것과 똑같이, 생명파괴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의 입에 아직 불고기 양념 소스의 그 달큼한 향내가 아련히 감돌고 있다면, 이 표현은 그이의 존재와 격에 참으로 걸맞을 터이다. 이 말은 터무니없기 그지없는 말, 사악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인간은 본래 야만적이지도 않고, 지금 우리 시대에 동물을 먹는 것은, 식물을 먹는 일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08.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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