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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24

제주도와 탈성장 예고편을 보니, 제주도 이야기네? 간간 주인공의 입을 통해 나왔던 남방큰돌고래가 나올지 모르겠다. 제주도는 오늘의 한국이 압축된 섬 같다. 한국의 가지가지들이, 갖가지 역사와 욕망과 그 결과물들이 이 섬에 응축되어 섬을 헐떡이게 한다. 오사카와 연결되면서 조선반도에서 가장 먼저 탄소 근대의 격랑에 휩쓸리기 시작한 곳이 제주도이고, 1940년대 중반 조선을 분단국가로 만든 좌우대립, 좌우투쟁이 가장 맹렬히 폭발한 곳이 이 섬인가 하면, 21세기 들어선 인류의 지반 전체를 뒤흔들 기후변화의 충격이 어느 곳보다도 먼저 제주도의 바다와 산에서 시작되고 있다. 코로나 이후 하늘길이 막히자 최우선의 관광지로 우뚝 솟은 섬, 본토(육지)인들이 먹고 싸고 폐기하고 나서는, 그 똥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곳. 그래도.. 2022. 8. 29.
번역가의 의무? 번역가(인/자)에게 의무/임무/소명이란 게 있을까? 번역인의 범죄라는 것은 있을 것이다. 미역을 사다가(캐다가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역국을 손수 끓여본 사람은, 미역의 성질을 안다. 달리 말해, 미역의 “다 발현된 것은 아닌 경향과 성향”(제인 베넷, )을 알고, incipient라는 단어의 뜻을 쉽게 간파해낸다. incipient는 제인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개념어이다. 금속이나 암석, 목재, 먹을거리 같은 물질의 본질을 “incipient tendencies and propensities”라는 말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미역과 제인 베넷을 뒤섞어 이야기해보자면, 한 줌의 마른 미역은 물이라고 하는 외부의 힘과 긴밀히 접촉하여, 그 접촉 방식(접촉 시간과 접촉 면)에 따라 각기.. 2022. 6. 16.
생태주의자 법정 1. 2021년. 영주 부석사를 다시 찾았던 해 그리고 공주 마곡사를 알게 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마곡사에서 하루 자고 (템플 스테이) 다음 날 사찰 내 서점에서 법정 스님 글모음집 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손에 들어온 이 책에서 몇 구절 옮겨본다. 아래 글은 모두 이 책에서 뽑아낸 법정 스님의 글이다. 깊은 시심, 찬찬한 눈빛, 맑은 생각. 이러한 것에 형체감을 부여할 수 있다니, ‘글/말’은 때로 대단하다. 2. 그대는 하나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알맞은 땅을 찾아야 한다. 사람 누구에게나 땅과 접촉하고 흙에 뿌리박은 삶이 필요하다...모든 사람이 흙을 가꾸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모든 영혼은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그 새롭고 부드러운 대지,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마주.. 2021. 12. 7.
내가 생각하는 환경운동 환경운동을 먹고 살 만한 자의 운동, 또는 한가한 자의 운동이라고 생각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기후니, 탄소니, 산림청의 30억 그루니, 채식이니 동물권이니, 당장 하루하루 살기에 바쁜 사람이라면, 눈 돌리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나는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 외 자연은 그 다음”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으니, 사람 아닌 것“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여유 있는 자의 운동이 환경운동이라는 생각도 그리 기상천외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부 현실의 오해, 현실에 대한 이해 부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에게 환경운동이란, 나 스스로 인간다움을 움켜쥐어 ‘짐승’(불교의 맥락에서의 짐승이지 권리의 주체로서의 동물이 아니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 2021. 6. 3.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 고래다, 로 기억하면 좋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명작 (2018)을 어제 보았다. 오늘, 집 안에 있으면 딱 좋을 크기의 연못, 동네 연못 주변을 산책하는데 어제 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쇼타의 아빠(가짜 아빠인가?)가 쇼타를 버스에 태워 보낸 후 “쇼타!”라는 소리를(이것은 언어가 아니라 소리이다) 애절히 외치며 버스를 쫓아가던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이 연못에서 그 장면이 하필 떠오른 것은, 이곳이 내가 (아들) 마틴과 추억을 쌓은 곳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가 저 쇼타의 (가짜) 아빠랑 다른 것이 뭔가, 라고 자조 섞인 질문을 내게 던져 보는 것이다. 도둑질 말고는 아들에게 가르칠 게 없는 아빠, 아들을 학교에 못 보내는 아빠, 하지만 놀아주기는 엄청 잘.. 2021. 5. 14.
지구의 날 단상 Earth Day. 1970년 태평양 동쪽 나라, 미국에 살던 이들이 만든 날이다. 한국말로 지구의 날이라 한단다. 남들이 지구의 날이라 부르니, 나도 그저 그러려니, 지구의 날이라 부른다. 지구의 날? 무슨 말일까? 지구가 주인인 날? 지구를 위한 날? 지구를 생각하는 날? 지구의 가슴에(석유를 뽑겠다고 해저에, 고속철을 깔겠다고 산에) 대못을 서슴지 않고 박아온 사람들을 눈감아주고, 그들과 같이, 그들 곁에서, 아니 그들에게 기생하며 사는 우리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생각해보면, 지구를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날, 지구를 애도하는 날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40년 수령이 넘었다고 전부 베겠다고 덤비는 이성을 상실한 개새끼들을 이웃으로 둔 우리로서는, ‘지구’라는 단어를 들으.. 2021.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