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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24

물에게 준 소리 (15) 어린이 합창단 하늘색 옷을 차려 입은 초등학교 3학년 또는 4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 수십 명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합창을 하신다. 맞은 편에는 검정 옷을 차려 입은 또래 아이들, 그리고 서서 지휘하는 여선생님. 둘레에는 구경꾼들. 구경꾼은 아무 곳에나 모이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들은 울타리를 쳤다. 어느 만큼 아름다운가? 속세간의 번뇌를 일거에 녹일 만한 아름다움이다. 임성합도 소요절뇌가 아니라 임성합도 합창절뇌다. 눈감은 비로자나불 옆에 모인 보살들의 설법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나는 이 학생들보다도 앉아서 구경 중인 학생들보다도 구경 중인 아이들 뒤쪽 빈 공간을 한 마리 벌레처럼 기어가던 말 못하고 걷지 못하는 아이가 더 좋았다. 합창하는 아이들도 참으로 아름답지만 그들은 .. 2011. 7. 7.
물에게 준 소리 (14)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 오규원 시인이 말년에, 즉 승천하기 전에 쓴 시편들을 읽었다. 맑다. 고요하다. 정갈하다. 사붓하다. 가분하다. 그런데도 조탁의 흔적이 또는 고음의 흔적이 없다. 조탁과 고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는 몰라도 쉽게 내려 쓴 느낌이 난다. 말을 잘 골라 골라진 말만 이리저리 음률로 그림으로 직조해놓았는데도 애써 골랐다는 느낌이 거의 나지 않는다. 쉬우면서도 그윽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된 서법[서예] 작품과 비슷한 것이다. 오규원의 시를 선시禪詩라 부를 순 없을지 몰라도 거기엔 모종의 선미禪味가 서려 있다. 일획으로 긋되 꾸미거나 망설이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 이러한 초서草書에는 그 율동감, 역동감 탓에 하는 수 없이 선의 맛이 난다. 꾸미거나 망설인 것의 더러운 맛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으로 다른 깨끗의 맛이.. 2011. 6. 28.
물에게 준 소리 (17) 기후변화—현실과 입방아의 간격 기후변화로 아까시[아카시아] 나무들의 씨가 마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에 없던 (기후변화성) 전염병이 돌아 꿀벌의 씨가 마르고 그리하여 충매화 과 과일들의 씨가 마르고 그리하여 과일 값은 1인당 탄소배출량처럼 치솟고 그리하여 기후변화를 현실의 삶에서 느끼는 이들은 과일에 손이 갔다가 도로 놓고 마는 밑바닥 사람들 양봉농가들, 과수 농가들, 그리고 아까시, 꿀벌, 충매화 과수들, 충매화 식물들. . . . 그리고 이들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더는 예전처럼 속 편히 찬미할 수 없게 된 시적 예찬가들. . . . 사계의 찬미자들. . . . 이렇게 기후변화의 일차적 피해자는 모두가, 전부가 아니다. 아까시가 있든 없든 상관 없고 토종꿀이 없으면 수입꿀 먹으면 그만이고 과일값이 오르건 말건 인생에 아무런 .. 2011. 6. 26.
물에게 준 소리 (8) 사람 안는 사람 한 사람의 선량한 마음은 그 사람의 질투심, 오만, 외고집, 거짓 얼굴, 거짓 말, 비-용기, 비굴, 아첨, 성내는 기질, 교활한 마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둘은 몸과 마음이 사람에게서 분리 불가능하듯 흙과 뿌리와 가지가 나무에게서 분리 불가능하듯 서로 딱 붙어서 분리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의 말일 뿐이다. 이러한 통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즉 진일보한 철학자는 말한다. 그 사람에게 자신의 그러한 위선됨을 알도록 해주는 것 즉 그 사람의 위선됨을 깨우쳐주는 것 그리하여 그를 부끄럽게 만드는 길과 그 사람에게서 그러한 위선됨을 다 들여다보되 오직 그 사람의 장점만을, 그 사람의 선량한 본성만을 그 사람에게 말해주는 것 그리하여 그를 웃게 만들고 그리하여 마치 물이 소리 없이 표면에 스미듯 자.. 2011. 6. 14.
물에게 준 소리 (7) 나무 안는 사람 찰스 다윈은 32세 되던 해에 다운 하우스를 구입하고 이 해부터 은둔자-연구자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이 은둔자-연구자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를 이러한 유형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세 기둥은 그의 부유한 가계 그의 지적 실력과 의지 그의 병이었다. 다윈은 자신의 집이자 연구실인 다운 하우스에 칩거하며 매일 샌드 워크Sand Walk (모래 산책로)를 걸었다. 매일 콩코드의 자연이 허락하는 소로를 홀로 걸었던 자연과의 대화에 미쳤던 현자 소로처럼 그 역시 홀로 하는 소요 산보를 즐겼다. 생각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에게 소요는 여기가 아니다. 그이에게 소요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시간이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애인이다. 다윈처럼 소로처럼 생각을 만나기 위해 또는 생각에 묶이기 위해 생.. 2011. 6. 5.
물에게 준 소리 (5) 아힘사 달려온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온다. 저쪽 풀밭으로부터 이쪽 풀밭으로, 내가 걷는 쪽으로 달려오는 이것은 다름아닌 개 한 마리다. 달려오는 이 놈은 제 법 몸집이 있는 점박이인데 그 주인은 50-60대 여인네다. 달려온 점박이는 기어이는 내 품에 와 안긴다. 왜냐하면 내가 녀석을 쓰다듬어 주고 반기어 주었으니까. 세상에 나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를 향해 네가 달려온다는 것 세상에 나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너를 내가 보자마자 어루만진다는 것. 이러한 짧은 만남을 이룩하고자 저쪽으로부터 이쪽으로 무섭게 달려오는 그 힘을 아힘사라 불러보고 싶다. 비폭력의 힘이라 불러보고 싶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따져 물을 것이다. 아힘사는 사람의 덕목이고 개한테 그런 걸 붙여주면 되나? 개는 한낱 미물이고 사람은.. 2011.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