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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번역가의 의무?

by 유동나무 2022. 6. 16.


번역가(인/자)에게 의무/임무/소명이란 게 있을까? 번역인의 범죄라는 것은 있을 것이다.

미역을 사다가(캐다가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역국을 손수 끓여본 사람은, 미역의 성질을 안다. 달리 말해, 미역의 “다 발현된 것은 아닌 경향과 성향”(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을 알고, incipient라는 단어의 뜻을 쉽게 간파해낸다. incipient는 제인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개념어이다. 금속이나 암석, 목재, 먹을거리 같은 물질의 본질을 “incipient tendencies and propensities”라는 말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미역과 제인 베넷을 뒤섞어 이야기해보자면, 한 줌의 마른 미역은 물이라고 하는 외부의 힘과 긴밀히 접촉하여, 그 접촉 방식(접촉 시간과 접촉 면)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변전하는 “다 발현된 것은 아닌 저만의 경향과 성향”을 지닌다. 미역의 이런 경향- 성향과 물이라는 외부의 힘이 함께 작용해 미역을 생동하는 물질이게 한다/생동하는 미역의 물질성을 세계에 내보낸다. 마른 미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만물이 incipient한, 즉 다 발현된 것은 아닌 경향과 성향을 머금고 있다. 목재는 불타고, 흑연은 문자로 변성되고, 클라리넷은 음악을 꽃피워낸다.

그런데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을 책임진 이는, 이 단어를 영어 사전에 나오는 대로 ‘발단적’, ‘발단’이라고 해놓음으로써, 제인 베넷과 한국어 독자를 갈라 놓는다/한국어 독자를 제인 베넷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훼방한다.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자가 강폭을 더 넓혀놓는 것이다. 또는 앙금에 모래알갱이가 드문 드문 섞인 팥빵을, 하나의 팥빵으로 내놓는 파렴치?

이런 예는 수다하다:

carbon neutralization = 탄소 중립 (화학과 정치학의 개만남)
decoupling = 탈동조화 (뭘 동조하냐구요?)
positive feedback = 양의 되먹임 (이건 완전히 개미친짓, 개미짓이다)

초기에 이런 말에 부딪힌 사람은 창의력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질문하는 능력, 토론하는 겸손함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 것이 만일 있다면!

번역어위키피디아는 이래서 필요하다. 아상블라주를, 서브센덴스를, 노란싸리닢이한불깔린토방에 햇츩방석을깔고 호박떡을 맛있게도먹는 우리 여우난곬족들도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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