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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소리 Artarmon에서 Long Bay로 향하는 길을 걸어볼까 하는 마음에 문득 나선 길의 기억이 마음에 찰싹 붙어 있다. 때는 한낮이었고, 점심을 끝낸 나는 얼마간은, 그러니까 몇 시간 즈음은 하던 일에서 놓여나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된다는 것을 홀연 자각했을 것이다. 그니까 이는 하나의 요청에 대한 발견인데, 달리 말하면, 어디선가 들려온 하느님의 권유에 대한 “예이~” 조의, 혹은 경상도 사투리 “야~” 조의 응답인 것이다. 이리하여 길을 나선 나는 아타몬 리서브를 지나 Oval 너머 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인데, 다시 등장한 윌로비 쪽의 리서브를 걸을 적에, 문득 벤쿠버의 스탠리 파크를 걷던 날이 생각에 떠올랐던 것이다. 시드니는 정말 기이한 곳이어서, 시티의 치나 타운을 걷고 있을 때는, .. 2009. 12. 29.
한글날 오늘은 한글날이다. 한자를 배워보고 영어를 배워볼 수록 한글에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아마도 그의 인생 기간 중 “無慾의 시대”라 부를 수 있는 유년시절에 한글과 함께 한 사람일 것이다. 글자를 쓰진 못했지만, 입말을 들을 수는 있었던, 입말도 제법 할 줄 알았던 그 시절, 그가 하룻밤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본 감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를 그는 감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라 부르는 이외에는 이들을 달리 부르는 방법을 아지 못했다. 하므로, 그 때의 감, 대추, 포도들이 주던 어렴풋한 감각, 대추나무 잎의 시원함과 포도나무 그림자의 서늘함과 감나무 나뭇가지의 의연함의 느낌도, 모두 이 낱말, 그가 어머니, 할마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관찰하며 따라 불렀던 감, 대추, 포도라는 낱말을 떼어.. 2009. 12. 29.
春雉自鳴 봄철 꿩이 스스로 울다 춘치자명春雉自鳴. 봄철 꿩이 스스로 울다 -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제출물로 한다는 뜻으로 부정적으로 보면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어쩐지, 이즈음 이 몸의 상태랄까, 욕망의 상태랄까 하는 것을 짚어내는 말 같기도 하여 한번 소리 내어 읊어본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번 울어보고 싶어 목을 뽑아보니, 봄이더라는 말이고, 다른 봄이 아니라, 정신의 봄, 관계의 봄, 철학의 봄, 문장의 봄이라는 말이다. 하여간 나는 싸릿문을 열고 성큼 나아가 목울대를 울림시롱 길게 한번 기운차게 울어봐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간 해왔는지 모르고, 그런 울음을,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허공을 향하여 실컷 울어보고 있는지 모른다. 이를테면 김연수가 무대에 오른 지 10년이 지나 {나는 유령작가.. 2009. 12. 29.
Ergo Sum 새벽에 선생의 일기에 눈이 갔다. 몇 페이지를 후루룩 넘기다가 선생이 돌아가신 모친의 묘소에 갔다 왔다는 일기에 눈이 머물렀다. 잘못된 머묾이었을까. 몇 줄 읽는 동안 그만 뜨거운 것이 후끈 솟나면서 눈으로 흘러나오고 말았다. 내리사랑은 짐승도 다 하는 것이지만, 올리사랑은 성숙한 사람, 철든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연후 이 글을 읽어서였을까. 실로 오랜만에 축축한 어떤 것이 몸에서 솟아남을 느끼면서 나는 내가 사람으로 살아 있음을 문득, 어떤 해방감과 함께,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말의 기계, 사물과 말에 대한 뉴론들의 반응적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신비를 지닌, 가느다란 숨을 지닌, 생명체로구나……. 이러한 자각은 어떤 소쾌한, 그리하여 다시 소생한 듯한 기분, 새로운 빛으로 .. 2009. 12. 29.
꿈에 김수영을 본 이야기 꿈에 김수영을 보았다. 꿈에 작가를 만난 것은 거의 없던 일인 듯하다. 하여간 꿈에서 만났던 사람은 분명 김수영이었다. 꿈에서 일어난 사건 중 일부는 이렇다. 이 사람은 기혼남이다. 나이는 한 마흔 대여섯 쯤 되었다. 아내와의 사이는 원만하지 않다. 이혼할 정도는 아니지만, 범박한 부부 사이도 아니다. 그는 지금 도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다. 혹은 친구를 만나러 찻집에 가는 길이다. 업무라 해보았자 신문사에 들러 원고를 건네주는 일, 출판사에 들러 번역원고를 받아오는 일, 지난 번 번역 비를 챙겨오는 일 따위다. 하여간 지금 길을 걷고 있는데, 우연히 아는 여자를 만난다. 이 여자는 친구의 부인으로 평소 가깝게 지내지는 않지만 서로 안면식도 있고, 대화도 곧잘 나눈 적이 있는 터수다. 진.. 2009. 12. 29.
비올처럼 결국 사람이 관계의 존재인 한 일의 경중을 떠나 일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일처리의 방법이랄지, 접근태도랄지 하는 것이 그의 인생, 얼굴, 몸, 하루의 섭양에 결정적인 것이다. 어떡하면 한안하고 방달하게 일에 통할까. 어떡하면 평담하고 현달하게 일을 이룰까. 어떡하면 넉넉하면서 한아한 얼굴을 빚어낼까. 그리하여 어떡하면 마음에 일이 없이 일을 척척 처리해나갈까. 쉼이 베어든 일을 이룰까. 결국 이것은 근본 기량과 관계있는지 모른다. 근본 기량 공부는 그런데 순간의 공부가 아니고, 며칠의 공부가 아니다. 삶의 허무성에 대한 철두철미한 직관적 이해만으로도 부족하고, 어떤 탐착심도 끊어버린 허정한 마음 상태를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이것은, 김우창 선생의 표현을 살짝 빌리자면, 지속을.. 2009.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