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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장 탈근대 전환

기후 상수 시대는 오래되었으되, 보급투쟁의 살기는 올해가 원년

by 유동나무 2021. 2. 16.

 

1. 앨 고어(Al Gore)불편한 진실이 출간된 것이 14년 전인 2006년이지만,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세계 각국에 공유되기 시작한 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옛일이다. 1997년 교토 협정,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지만, 세계적 첫 합의의 해인 1997년으로만 잡아도 무려 23년이 된다. 사태가 이러하거늘, 2020년 여름 수해 사태에 이르러서야 기후변화가 심각함을 인지했다는 딴지 총수김어준의 고백은 놀랍다기보다는 맹랑하고, 경이롭다기보다는 경악스럽다. 23년 동안, 대체 그는 어떤 세상을 살았던 걸까?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하고 다닌 걸까? 그는 남한 기후 "귀마거리"(귀머거리는 청각 장애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라고 하는데, 귀를 틀어막고 살았다는 뜻으로 이렇게 쓴다)들의 표본이다.

2. 1860년대와 1870년대, 벽안(碧眼)을 한 사람들의 함선 앞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시험받았다. 향후, 이 생각이 산산이 부서지는 과정은 곧 조선의 자식들이 서구 콤플렉스를 내면화하는 치욕의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의 자식들을 지구질서라는 의미에서의 세계그리고 세계보편적 지식의 지평에 열어놓아 세계보편의 시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유길준이나 안창호로 상징되는 이런 상승의 흐름은, 그러나 광복 후 좌우 투쟁과 그 폭발인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기세가 돌연 꺾이고 만다.

그러나 바야흐로 1989해외여행 자유화”(얼마나 기이한 단어인가!) 이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바다 밖으로, 바다 밖으로 나아갔던가. 그러나 이 "방생의 대장정"은 조선인의 서구 콤플렉스를 얼마나 씻어주었으며, 조선인으로 하여금 세계보편감각을 얼마나 체득케 했을까? 조선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역시 벽안인 사람, 타일러가 두 번째 지구는 없다며 조선인에게 지구를 알려주고, 역시 벽안의 이방인 그레타 툰베리가 조선의 10대들이 나서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먼저, 대신 하는 현실은, 물바다, 흙바다가 된 하동, 남원, 곡성, 제천, 철원만큼이나, 수해 입은 농민들은 재해보험에 가입해도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뉴스만큼이나 서글프다.

(물론 당신 말대로 우리에겐 조천호 선생이 있긴 하지. 하지만 그는 또는 다른 조천호는 왜 2018년 폭염 때는, 아니 지난 20년 내내 언론에 초청받지 못했던가.)

3. 지난 한 주간은, 한살림 매장에서 코로나 초기 국면에 나타났던 보급투쟁현장의 살기가 다시 살아난 부활 주간이었다. 코로나19로 각자의 로 퇴각한 굴 동물의 삶은 장기장마를 계기로 다시 부활했고, 마트의 텅 빈 채소 선반은 다가올 미래를 훤히 보여주었다. 2019년 가을이던가, 내가 어느 대중강연에서 올해는 배춧값 하나만 올랐지만, 만일 내년에, 내후년에 배추만이 아니라 수십 종의 과일과 채소값이 오른다면 어떨까라고 했을 때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지던 분이 떠오른다. 기후위기의 직격탄은 일부가 받을지 모르지만, 그 탄피는 모두에게 떨어진다. 모두의 식탁에.

4.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팬데믹은 앞으로 삶의 상수가 될까? 이런저런 유형의 동물원인성 감염병이 주기를 달리 하며 우리네 삶에 찾아올까? 그것은 모르겠으나 기후재난, 기후재앙이 삶의 상수가 되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10년도 넘게 말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기후위기는 해결해야 할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서둘러 적응해야 할 새로운 삶의 조건이다.

5. 그러나 여기서 적응은 무기력한 순응을 뜻하지 않는다. “적응은 두 가지 갈래의 행동을 뜻한다. 하나가 배출 제로(emission zero)” 경제로의 이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기후재난민, 기후재난마을/도시의 회복력 증대인데, 영어권에서 resilience라고 쓰고 한국어권에서 아무런 맥락도 모르고 회복탄력성이라고 번역해 쓰는 이 단어는 (영어권에서는) 바로 이 후자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다. 혹자는 온실가스 감축으로 사태는 나아지지 않는다며 모든 역량을 기후재난민/마을/도시 지원 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일면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농민을 사적 이윤 추구자로 인식하는 프레임을 거두고, “공적 농생태계의 관리자”, “공동체 식량 생산자로 재인식함이 필요하다. 이렇게 다시 보면, 이런저런 사적 재해보험이라는 안전망 대신 기본소득, 국가기후재난기금 같은 공적 안정망으로 이들의 활동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원칙이 다시 보이게 된다. (2020. 8, 유동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