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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장 탈근대 전환

한국인과 지구온난화: 덧글대화

by 유동나무 2009. 8. 29.

실피드님

수학을 배우는 것이 이런 말장난을 분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라는 것은 누적된 이산화탄소양을 기준으로 보면 '증가율'이고 미분인 셈인데,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이라고 하면 이 값을 줄이는 거겠죠. 이 감축을 적극적으로 하더라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를 억제할 정도도 될까말까 합니다. 지금 같이 한다면 증가를 늦출 수 있는 정도겠지요.

 

미래에 배출할 양을 기준으로 '감축'이라고 하니 이 무슨 기만입니까.

과거에 배출하고 있던 양을 기준으로 해야 비로소 '감축'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고, 적어도 작년이나 재작년 배출량을 기준으로 해야 정상이지요. 정부가 이런 말장난을 해서야 어디...

 

"인플레이션율이 감소했습니다"라는 말로 지지를 얻었던 미국 대통령을 2차 미분을 정치에 도입한 최초의 정치가라고 하더군요. (웃음) 지금 녹색성장위는 저렇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양인데 국제 사회에서 눈감아주겠습니까 어디..



소서재인


어딜 좀 다녀오느라 덧글을 늦게 봤습니다. 잘 지내죠?

 

그러니까, 지적하신 것의 연장선상에서 말해본다면, 과학과 이성이라는 것, 혹은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근본 심급으로서의 이성이라는 것이 절대 부정되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혼돈의 시기일수록 냉철한 이성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1) 정부의 말장난 = > so what? I don't care! It is in fact OK! For me, economy is much more important!

 

2) 정부의 말장난 => 국민사기극, 자기경멸 에 대한 분노!!

 

이 둘 중에 실피드님 사시는 동네의 이웃분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계실까요?

 

아마도 1)에 가깝지 않을까요?

 

지난 미국 산 소고기수입 소동에서 거의 전국민들은 <가능한 불행>에 대한 예측에 근거해서, 2)의 태도를 취했습니다만,

 

이 <가능한 불행>에 대한 예측, 혹은 그에 대한 논의가 부실한 지 어쩐지, 소고기 섭취보다 훨씬 더 심중한 문제인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2)가 나오지 않는 듯하네요.

 

저는 해외에 있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니, 정황이 다르다면, 일러주시길. . .

 

오히려, <설마>의 비이성적 소망, 책임회피 욕망의 힘이 사람들의 귀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비이성적 소망과 욕망이라는 것은, <잘 사는 삶>에 대한 물질주의적 기준, 그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욕망과 분리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실피드님

저는 거시적인 시각보다는 세세한 사항에 더 집중하게 되는 편이라 ㅅㅇ님과는 좀 시각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전 국민이라 하면 좀 다루기가 난감한지라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과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나눠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일단 전체적으로 뭉뚱그리자면,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풀어볼 수 있겠네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매우 단순한 원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ㅅㅇ님이 계신 호주는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온난화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나 영향이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산지 표기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던 '먹거리'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랄까요. 온난화 때문인지 변화한 해류 덕에 어업은 상황이 더 좋아졌다고 하고, 전에 재배할 수 없었던 지역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는 등, 우리나라는 오히려 지금 덕을 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런지요. 가까운 일본은 규모가 커지고 더 자주 발생하는 태풍 덕에 긴장감을 맛보고 있는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지요.

 

적극적으로 뭔가 해야겠다는 이야기가 민간이 아니라 정부에서 나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입니다만 (그로 인해 정부의 계획이라는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도 매우 유감입니다) 한국 사람들 대다수가 온난화에 대해서 다른 나라만큼 관심이 없는 것은 피해 (잠재적이든 직접적이든) 당사자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일 겁니다. 전 세계가 하나의 세상이라는 큰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다면 모를까, 적도 근처의 여러 섬나라들까지 신경 쓸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걱정하는 것처럼, 지구 온난화 문제에서 등을 돌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서로 간에 지켜야 할 도덕적인 책무를 저버리는 것으로 비춰져 비난과 실질적인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그런 정치, 외교, 경제적인 실리일지, 지구, 자연, 인간과 같은 대의일지.. 저로선 쉽게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군요. 우울한 결론이지만 저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접하고 있는 문제에만 반응하고 나머지는 '여유'가 생겨야 돌아본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들은 (지구 전체를 위해)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 애를 쓰는데 많은 개발 도상국, 아프리카에서 온난화 방지대책과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들이 그들이 연구해서 내놓은 대책에 동참해주는 댓가로 약속한 것들(기술, 의료, 자금 지원)은 아직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고, 이러한 목표와 당사자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괴리 또한 해결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약속한 것을 충분히 제공하고 그들에게도 지구 환경 살리기의 대의를 이해시키는 것이 당연한 해결책이겠죠. 어쨌든 선진국들은 전 세계적인 경제난을 들어 약속 이행을 미루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은 그럴만한 여유를 가진 나라이고, 전 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에 사는 사람 개개인을 보자면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궁금증도 있습니다. 저는 그저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라도 관심을 갖고 동참/지원 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이번 달 집세가 걱정이고, 오르는 생활 요금 걱정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건 꽤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래도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는 것 말입니다. ㅅㅇ님의 건투를 바랍니다. 저는 여기에서 제가 할 일을.

 

소서재인

답변이 너무 늦어져서 답변을 한다는 게 어색해지는 시간까지 오고 말았네요. 그래도, 답변을 안 드리는 것은 저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므로, 멋이 적지만, 이렇게 포스트 형식으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변명을 다시 드리자면, 근자에 바쁜 일이 있었어요. 정신이 없다보니, 애인 (=블로그) 만날 짬도 없었네요.

몇가지 생각나는 대로 말씀을 드릴게요. 엊그제 한국 뉴스를 찾아보니, 이명박 CEO님 지지율 41%라 하더군요. 이게 일시적인 것인지 어쩐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대선 때 방관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CEO, 오순절 교단 사람을 임금자리 (사실 한국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까지만 해도 대통령은 국부, 임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요.) 에 올려 놓은 분들, '이제 정치를 알겠다'고 촛불 시위 때 거리에 나오신 분들, 이런 분들 가운데에서도 제가 소원감을 느낄 분들은 많을 듯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현 대통령과 일부 한국인들 사이에는 모종의 '동거' 심정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는 거고, 그런 공통 지대가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 욕을 하면서도, 그 욕이, 노태우에게 6 29 선언을 이끌어내게 했던, 그런 절박한 요구로 바뀌지는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선상에서, 우리 CEO님의 '녹색 성장'과 지구 온난화를 내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적 녹색 시민들의 녹색과는 상당한 공감지대가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우리 말에 <사해동포>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끼리만 동포가 아니라, 인류가 다 동포다, 이런 개념입니다. 우리 말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은, 우리 사상에 이런 사상이 있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사람들은 당장 이번 달 집세, 물가 걱정, 아이 건강, 교육비 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분들도 다 국제뉴스란 걸 보지 않습니까. 

지금 이곳의 일이 국제적 환경의 영향 하에 있구나, 그리고 그 영향이 참으로 지대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한국인이 자각한 것은, 19세기 중반, 후반의 일이지요. 그것도 엄청난 열패의식과 그로 인한 혼돈과 함께 그것을 자각했지요. 이 열패의식은, 조선이 유교 세계에서 유일한 적통국가다, 그리하여, 지상에 있는 국가 중 가장 훌륭한 국가다, 이런 모종의 우등의식이 산산조각나면서,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태는, 엄밀하게 보면, 혹은 큰 눈으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사실 별로 얼마 안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아직 남한/북한에 사시는 우리 동포들을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동춘 선생은, 한국 사회를 군사주의적 사회, 전쟁 상태에 있는 사회라 하시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아직 100년 전 조선인들의 사회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대 서구 열패의식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은데, 그걸 해준 게, 바로 삼성이고 현댑니다. 그리고 이 억눌려 있던, 지난 100년간 한번도 끊이지 않고 한국인의 혈관 속에 흘러오던 이 열패의식은 지난 2002년 월드컵 레드 광풍 때 그 괴물적인 모습을 드러내지요. 

내가 잘 낫다, 하는 것은 내가 못 낫다, 하는 의식의 반영입니다.

우등의식이 없는 이는, 열등의식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자유로워진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한국인들은 아직도 대 서구 열패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저 100년 전 조선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열패의식을 극복하게 해준, 현대, 삼성 의존적인, 혹은 CEO 의존적인 사람들입니다. 서구만큼, 서구못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서, 이전의 치욕을 보란 듯이 극복하고 싶은데, 그러자면, <성장>이 필요합니다. 

너무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국인을 이렇게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이죠,

예전에 해외 사람들에 대해서 열패 의식이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조선 때가 아니라 고려 때입니다. 성리학적 자기 중심성이, 오삼계가 북경의 문을 저 만주벌판의 야만족에게 열어준 이후, 강화되기 훨씬 이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해동포>의 이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태를 이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누군가 있어,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 할 때, 이건 타인, 타 생명체들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살고자 한다,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본디, 삶이란 공생적 기반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공생의 관계를 떠난 삶은 있을 수 없지요. 

<여유>가 있어야, 온실가스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하셨는데,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는 파렴치한인가요? 저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여유>가 없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말씀하신 점에 대부분 공감하지만, 

여유가 있어야 온실가스, 지구온난화와 같은 거시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말에는 선뜻 동의하고 싶지가 않군요. 그리고 그런 접근법으로는, <선 성장, 후 온실가스 감축> 논리를 강화하면 강화했지, 깨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여유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입니다. 하이데거는 이 관심을 <조르게>라 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삼았어요. 사람의 삶의 바탕은 곧 <조르게>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내가 지금 어떻게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지금 마시는 물이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고, 내가 싼 똥이 어떤 배관을 타고 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물은 어떻게 정수되며, 내가 내 아들 줄려고 산 이 떡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내가 세상이 싫어 마시는 이 소주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으며, 아내가 해 준 음식들의 출처는 무엇인지, 내가 부하직원들과 감자탕 집에서 먹은 돼지고기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 감자탕 집에 올라오게 되었는지, 

다시 말하여, 지금의 나의 삶, 경제문화적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타인/타생명체들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 관심은 곧 온실가스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웃을 때, 남이 피눈물 흘린다는 사태가 그 관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남은 인간만을 포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개안>해야 합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집세를 내기 위해서 그 어떤 짓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벗어나, 집세를 내기 위해 돈을 버는 과정에서, 나의 실존적 정황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태>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조르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원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이런, 또 너무 이야기가 거창해졌네요. ㅎㅎ

또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줄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막 쓴 것이라, 정리가 안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덧글적 성격이라 생각해주시고, 혜량해주시기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