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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愛-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의 존재론 3

by 유동나무 2011. 4. 14.

 

(Ai/) Love, Aimer, Gern, Amare, Amar, 사랑하다  

일설에 의하면, 이 낱말의 윗부분의 뜻은 어떤 기운이 가슴에 가득 차오름이다. 아랫부분은 천천히 걸음이다. 어떤 기운이 가슴 가득히 차올라 일상 행위를 더디게 하고 마는 사태를 이 낱말은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옳다면, 고대 중국인에게 사랑은 사람의 일상 생활을 더디게/멈추게 하는 힘이요 기운이다. 가슴 가득 번져가는 신이한 힘이요 기운이다.

 

 

다른 가설에 따르면, 와 애는 동일한 문자인데, 는 뒤를 향하여 사람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그린 라는 문자에서 그 뜻을 취한다. 즉 애뒤를 돌아보는 심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는 그러한 심정에 있는 사람의 전체 형상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1] 



사람이 평소의 걸음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사람이 자꾸 뒤를 돌아본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이 둘 다 무언가에 관심 (조르게Sorge)’ 함을, 관심의 대상이 되는 그 무언가에 매혹됨을 함의한다. 라는 낱말의 실체 혹은 뿌리는 관심함과 매혹됨인 것이다. 나의 관심을 끈 이, 나를 매혹시킨 이는 물론 나 아닌 타인이다. 나와는 분명 다른 존재자가 나를, 내 존재를, 나의 얼을 제 편으로 끌어당긴다. 이 끌어당김의 기운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나의 가슴 가득히 차오른다. 이 기운이 너무 강렬하여 나는 자꾸 그 사람 쪽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 라는 낱말이 이러한 의미를 함의한다면, 이 낱말은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 또는 사랑을 통해 체험하는 것을 극히 부분적으로만 지시하는 낱말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세 가지 요소가 사랑의 실체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타인을 향한 나의 구심력이다. 다른 하나는 타인 쪽으로 향하여 가는 나의 이동이다. 마지막 하나는 그 이동 과정에서 발견되는, 물처럼 절로 그 타인에게 흘러가고 마는 유영성이다. [2]  만일 우리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러한 말에 동의한다면, 위에서 본 바대로의 는 단지 이 중에서 첫 번째 요소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심의 주체, 매혹됨의 주체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심함, 매혹됨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제쳐놓고서는 결코 말해질 수 없다.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연인들 간의 관계성을 라는 낱말은 전연 포착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사랑의 주체의 이동, 유영성을 체현한 이동이라는 행동을 반드시 수반한다. 행동이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관계 맺음이요, 세계에 개진되는 행동이다.

 

 

나는 발견한다. 나는 매혹된다. 나는 나를 매혹하는 이에게로 다가간다. 그이와 하나인 상태가 되고자 그이에게로 다가간다. 그러나 그러할 때 나는 오직 물처럼 그이 쪽으로 다가간다. 즉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이 쪽으로 다가간다. 나의 이 다가감을 나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 막아볼 도리가 없다. 나의 자연은 나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해준다. . .이것이 바로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그이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그러한 생각함과 그리움 속에서 느끼는 설레임은 사랑의 왼마음이 아니라 쪽마음이다. 나도 모르게 그이에게로 다가가고 마는, 그이 쪽으로 물처럼 흘러가고 마는 자기 망각의 존재 상태, , 그이 쪽으로 흘러가 그이의 인정을 받는 기쁨’, 그러한 연후에 그이와 하나되는 과정 혹은 상태에서 용출되는 기쁨을 맛보아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사랑은 무아無我상태라는 존재의 황홀경과 나 없이 남과 하나되는 탈아脫我의 존재의 기쁨 없이는 결코 성립되지 않으며, 체험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사랑의 핵심에는 무아와 탈아의 경험이 있다.

 

 

설렘, 그리움도 고귀한 감정이지만, 그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설렘, 그리움, 온전한 설렘, 그리움이 되려면 반드시 무아/탈아가 주는 황홀경의 기쁨이라는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 그 기쁨은 발견의 기쁨, 매혹됨의 기쁨, 인정됨의 기쁨을 포함하고 동반하지만, 그 정수精髓는 나 없이 남과 하나되는 탈아의 존재 상태에서 용출되는 기쁨이다. 나와 나 아닌 이가 하나가 될 때, 하나의 존재가 될 때 용출되는 기쁨보다 커다란 기쁨은 이 세계에 없다. 이러한 존재 상태에서는 라고 하는 것은 거의 중요한 것이 아니요, 아예 느껴지지도 않는다. ‘라는 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둘의 하나됨, 둘의 일체됨의 일체 감각만이 사랑하는 이들을 휩쌀 뿐이다. 둘이 하나가 될 때, 그 하나된 마음은 날카롭기가 쇠 []와도 같고, 하나 되어 하는 그 말은 향기가 난초[]와 같다 하였으니, 그들 사이의 관계는 마치 금란金蘭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체됨의 느낌은 그 느낌의 당자에게, 사람이 통상적으로 가지기 매우 힘든 희귀한 마음 태도를 지니게 한다. 그 태도는 다름 아닌 자기 희생의 태도다. 사랑하는 그이를 위한 것이라면, 나라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관계 없다, 그이의 생명, 그이의 얼, 그의 몸이 건강하게 보존되고 지속되게 하는 일이라면,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나는 그 일을 하고 싶다, 는 보통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마음이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속에서는 저절로 끝도 없이 샘솟아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존재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경험이 그 경험의 당자에게 라는 존재의 화살을 완전히 뽑아내 버린 것이다. 평상시 나의 생존, 나의 복락, 나의 쾌, 나의 과업, 나의 명예 따위에 관심하며 살던 나는 이제 온데 간데 없고, 나의 관심 자리에 다른 존재자가 자리잡는 것이다. 사랑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무아無我의 특별한 존재 상태는 지속된다. 

 

 

그 어떤 존재자도 가림 없이 차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커다란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는 한 6년 가량 이 세계에 물들다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도, 아상我相의 수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늘에서 떨어진, 하늘의 한 조각인, 무구한 어린 아이는 이제 제 것만 아는 기이한 괴물로 변모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타락이며 퇴락이며 추락이다. 아이는 적어도 제 친구, 제 가족은 생각할 줄 안다고 해도, 그러한 생각 역시 제 것생각의 연장이지 다른 생각이 아니다.

 

 

이러한 전환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이라면, 사랑의 경험이 가져다 주는 존재의 전환은 인생의 두 번째 전환이다. 사랑의 문을 통과한 이의 자아는 산산조각 난다. 이 통과의 경험은 그 경험자에게 존재의 지대를 변환시킨다. 나아가 그 경험자의 존재 자체를 탈바꿈시킨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존재자로 살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여, 그의 세계와 그의 존재는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신천지, 창조성이 서린 신천지에 우리는 닿아 보아야 한다. 황홀한 탈-자아의 신천지에 우리는 닿아 보아야 한다. 사랑의 체험이 하나의 밀물이 되어 우리의 인생 전체를 뒤집어버리고 마는 사태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고 마는 사태를 어떤 무한한 감격 속에서, 무한한 놀라움 속에서 우리는 체험해보아야 한다.

 

 

혹자는 이러한 사랑은 결국 육체적 쾌락과 쾌락욕을 동반하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겠냐고,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당신이 말하는 이러한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 아니겠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하나의 같은 원리를 공유하고 체현한다. 세속 세계에서의 남녀 간의 사랑도, 탈 세속 세계에서의 신과의 사랑, 형이상학적인 사랑과 동일한 어떤 성질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동일한 원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를 매혹하는 주체인 타인이 왜 나를 매혹하는가? ‘라는 질문을 통하여 제시될 수 있다. 이 질문을 풀이하면 이렇다. 나는 도대체 매혹되는가? 나아가 이 매혹됨은 나를 전환시키는가? 그 매혹됨의 사태는 어떻게 하여나로 하여금, ‘나는 죽어도 그만이니, 그이만은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한한 마음을 갖게 하는가? 세계가 이대로 끝나도 좋겠다는 지극한 사랑의 기쁨은 도대체 어디에서오는가? 이러한 존재의, 마음의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가능한 것인가? 무엇이사랑의 열락을 나에게 경험케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내 사랑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거룩함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 타인에게서 내가 발견한, 나를 매혹한 어떤 이상성理想性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 거룩한 것, 이상적인 것을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서 발견한다. 달리 말하면, 거룩한 것, 이상적인 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를 매혹한 것, 내가 사랑의 대상에게서 발견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아름다움인 것이다. 보다 잘 말하여, 그것은 바로 타인의 존재에서 드러나는 거룩함, 이상적임, 아름다움인 것이다. 거룩’, ‘이상’, ‘아름답은 결국 하나의 다른 이름들이다. 평소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던 어떤 육체를 거느린 젊은이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칠 때, 우리의 눈이 한번쯤은 절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그 젊은이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이상의 표지를 간접적으로 혹은 어렴풋이나마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러한 이상, 거룩, 아름답의 발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 없이는 사랑의 탄생도 존속도 불가능하다. 설사 어떤 다른 계기로 탄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 없이 사랑은 얼마간 존속되지 못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혹은 말한 그이에게서
, 분명히 나의 존재 차원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타인에게서, 내가 되어야 할, 되고 싶은, 닮아야 할, 닮고 싶은 어떤 이상적인 면모를, 아름다운 면모를, 그리하여 어떤 거룩한 면모를 발견할 때, 나는 비로소 매혹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의 발견이 사랑의 가능성을 여는 키워드인 것이다.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이상적이고, 더 드높고,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한 세계로 이동하고자 하는 마음이요, 얼이요, 동시에 그 이동에의, 얼맘의 결행이요 선택인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의 존재를 뛸 듯 기쁘게 하는 것, 우리의 얼맘을 가슴 터질 듯 벅차 오르게 하는 것의 실체는 바로 이 이상, 아름답, 거룩이요, 그것의 발견이요, 그것에의 천연스러운 이동이요, 이동하겠다는 마음의 결행과 선택이요, 그 결행과 선택의 결과로서의 이상, 아름답, 거룩과의 하나됨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그 이상, 아름답, 거룩과 하나되고 싶었던 것일까? 왜 그것은 나를 매혹했던 것일까? 그것은 나의 본성인가?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우리는, 그 이상, 아름답, 거룩의 씨앗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으리라. 내 안에 있는, 그것에의 근본 지향의 씨앗이, 나를 그것 쪽으로 불러갔으리라 이해하는 편이 더 좋으리라.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사랑의 에센스는 다시-하나됨 Re-Uniting’ 이라고 말했을 때, [3] 그가 말한 것도 이것이었으리라. 이상, 아름답, 거룩을 향한 내 안의 열정, 씨앗의 형태로 있는 내 안의 이상, 아름답, 거룩이 이미 꽃열매의 형태로 있는 그것과 다시 만나고자 하여, ‘다시 만남 Re-Meeting’이 바로 사랑이리라.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 다시 하나되는 이, 다시 만나는 이는 테이야-매니아Theia-Mania’를 경험한다.  신이 선사해준 미친 상태라고 하는 매우 특별하고 고결한 존재 상태를 경험한다. 그것은 압지가 잉크를 죄 빨아들이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를 흡수하는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어떤 이상적인 거룩함에 내 존재를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내맡김이요, 그 흡수됨을 그 무엇보다도 수긍하고 찬미하고 기뻐함이다. 그러나 나는 왜 기쁜가? 단지 그러한 상태에서 내가 없어져서’? 단지 내가 무아, 탈아되므로? 아니다. 그 흡수됨을 통하여서만 나는 나의 차원을 벗어나,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만 있는 더 드높은 차원, 더 아름답고 더 이상적이고 더 거룩한 차원으로 도약될 수 있기에 기쁜 것이다. 그 흡수됨을 통하여 무아, 탈아되는 나의 존재, 새로이 창조되는 나의 존재는 더 드높은 존재를 향하여 있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사랑의 모든 열망에는 더 드높은 곳, 더 거룩한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혹은 올라가고자 하는형이상학적 열망이 어려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열망인 형이상학적 열망의 외화요 표현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랑은 어떤 우주적인 도약이라는 열망의 외화요 표현이다. 그것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했듯, [4] 인간이 우주에 관해 지니는 기초적이고 궁극적인 이상을 드러내는 형이상학적 감정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우주에게서 바로 받은, 이성理性으로서 완전히 설명 불가능한, 궁극적인 인간 지향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이러한 지향, 자신의 우주적 차원을 깨닫게 해주는, ‘안내하는 목소리를 지닌, 사랑하는 이가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강렬한 힘이자 기, 우주적인 힘이자 기 것이다. 어느 날 그 목소리는 내게 찾아 와서 나의 문을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내가 그 소리를 발견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낱말의 우주>, 궁리 , 2011, 5부 창조하는 인간 중)

 
  
 



[1]  시라가와 시즈카, 위의 책, 550-551

[2]  오르테가 가세트 (전기순 옮김), 사랑에 관한 연구, 2008

[3]  P. Tillich, Love, Power, and Justice, 1954  

[4]  오르테가 이 가세트, 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