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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文 – 글 또는 문학의 가치

by 유동나무 2011. 4. 9.

(Wen/) Text, Texte, Text, Testo, Texto, 글월   

일설에 의하면, 이 낱말은 본디 가슴에 새겨진 문신 또는 무늬를 나타낸 것이다. [1] 문신과 무늬는 벌써 상징이다. 정신의 표상이다. 이것과 문자와의 거리는 그닥 멀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본디 문신/무늬를 의미하던 은 머지 않아 문자를, 문자와 관련된 것들을 지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낱말은 중국에서 단순히 문신/무늬/문자만을, 혹은 문서/문장/문학 등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서, 즉 문화 또는 문명의 이념과 전통 자체를 의미하는 낱말로 사용되어 왔다. 그 자체로 고귀함, 신성함 등을 함의하였던 바 [2], 이란 그저 문자/문장[]/문학이 아니요, 야만의 반대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중국 문화와 그 문화적 이념을 상당 부분 흡수했던 사회인 조선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조선 왕실의 종친과 정2품 이상의 문무관이 사망한 경우, 사망자에게는 그 생전의 행적에 맞는 시호가 하사되었는데, 그 시호 가운데 가장 으뜸인 시호가 바로 도덕박문道德博文을 상징하는 이었던 것이다. 이 시호는 이를테면 청백수절淸白守節의 정, 경사공상敬事供上의 공, 사려심원思慮深遠의 익 같은 시호보다 훨씬 높은 시호였던 것이다. [3]

 

   이 문명을 함의하는 너른 의미로 쓰였던 이러한 사태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여러 한자어들이 또렷이 증거해준다. 문교文敎는 문장 교육이 아니라 예악 법도와 민속에 대한 교육인 것이요, 문명文明 문장의 밝음이 아니라 덕과 교양 전반의 밝음인 것이다. 문모文貌는 문장의 풍모가 아니라 사람의 몸가짐, 행동 거지인 것이요, 문식文識은 그저 문자에 대한 알음알이가 아니라 학문/교양/지식인 것이다. 인문人文이란 인류의 문화이자 인륜/질서인데, 이 말은 [주역] 궤에 대한 공자의 단사彖辭에서 비롯된 말이다. 단 왈, “문명이지文明以止 인문야人文也라 하였으니, “문명 속에서 그치는 것이 바로 인문이라는 말이다.    

 

   어떤 빼어난 형식으로서의 문장/문학을 지시하는 과 도덕적이고 교양적인 훌륭함 자체와 관계된 의미로서의 은 결코 우연히 하나의 낱말이었던 것이 아니다. 이 두 개의 의미군이 어떤 필연적인 이유로 인해 하나의 낱말을 통해 지시되어 왔다는 바로 이 사실. 바로 이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고 놀라야 한다. 바로 이것이 글과 문학의 가치 혹은 본령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문학을 위한 문학이 좋은 문학이지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함의가 강한 문학은 좋은 문학이 아니라는 소위 순수문학론의 입론이 한낱 억견臆見(문학이라는 것을 백판 모르고 하는 한낱 사랑방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이 낱말의 거울은 비추어주는 것이다. 오히려 순수문학론이 주장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좋은 문학 혹은 제대로 된 문학은 어쩔 수 없이 우리[독자]의 도덕성을 고매한 쪽으로 은연 이끌고, 우리의 정치적 감수성/판단 능력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도록 자연 도와주기 마련이다. 아니, 우리의 도덕성을 한결 고매하게 하며 정치적으로 우리를 더욱 깨어 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정신적 수준과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재조정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하여 궁극적으로는 더 높은 문명文明 창조에 기여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문장 전체를 우리는 참다운 의미의 문학으로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도덕적/정치적 고매성, 문명적 훌륭함/고매함이라는 가치와 문학의 가치는 서로의 뿌리에서 얽히고설켜 있어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사르트르Sartre가 강조하듯, “그것이 인간성을 얼마나 나쁘고 가망 없는 것으로 그리든 간에, 문학 작품은 반드시 고매함의 기운을 품어야[4] 비로소 문학 작품인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고매한 인간 정신에의 초대이자 호소로서의, 고매성의 특정한 응결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강조하듯, 문학 작품은 필연적으로 고매함의 기운을 품을 수 밖에는 없다는 말은, 문학 작품이 도덕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그 안에 높은 도덕성을 보이는 등장인물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5] 오히려 패덕한의 패덕 행위를 그대로 그린 작품일지라도 그것이 만일 잘만 된 것이라면, 그 작품은 독자를 고매한 정신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의 의분義憤을 자아내고, 그 의분의 출처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독자는 책을 읽기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독자는 자신의 분노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고매한 분노임을 깨닫고 그 분노의 출처가 비단 작품 속 내러티브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세계 그 자체의 네러티브의 변화 필요성에 진정으로 눈을 뜨게 된다. 

   그러나 사태가 이러한 것은 문학 작품이 도덕 또는 도덕적 고매함을 그 자체로서 혹은 그 문면에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문학 자체의 성질로부터 나온다. 즉 이것은 문학이 한편으론 심미적인 것을 구축하려는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론 언어를 재료로 삼아 그렇게 하려는 기이한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준오가 말하듯, 보통 예술은 의장意匠design으로 뜻을 삼는데, 문학의 경우엔 뜻을 품은 기호 자체가 의장이 되기 때문이다. [6] 사르트르는 다른 장르의 예술 작품들의 창작자가 감상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을 심미적 쾌감으로, 문학의 작가가 독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을 심미적 희열로 구분한다. [7] 그런데 그에 따르면 문학 작품의 독자가 느끼는 이 심미적 희열이라는 것은 본래는 나 아닌 것을 내가 거머쥐고 내면화하려는 의식의 차원에서나오는 것이다. 이 감정과 함께 독자인 나는 주어진 것을 명령으로, 사실을 가치로 변화시키는 것이요, 그때 세계는 나의 과업이된다는 것이다. [8] 무슨 말인가? 보통 내 일상 생활의 지평에서 세계는 자유의 요청으로서 내게 나타나지는 않는데, 문학이 제시하는 세계는 언제고 나의 자유의 요청으로서, 있어야 할 무언가의 성취의 요청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도대체가 문학을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행위들이다. 그리하여 독자의 자유를 신뢰하며, 독자에게 자유로울 것을 요청하며, 미적 희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작품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에서의 문학 작품이며, 그러한 작품의 심미적 요청에는 그리하여 으레 도덕적 요청이 밑깔려 있다는 것이다. [9]

 

   혹자는 순수히 심미적인 것에만 관계하는 순수 서정시에 무슨 도덕적 요청이 있겠느냐고 말하리라. 그러나 순수 서정시라 불릴 만한 시편에는, 만일 그것이 참으로 잘 된 것이라면, ‘시적 환기력喚起力이라 불리만한 어떤 힘과 언어 초월의 힘이 있다. ‘시적 환기력이라는 말은 시편 자체가 시의 독자의 경험과 삶을 홀연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말한다. 홀연 되돌아봄은 홀연 깨어남을 함의한다. 홀연 깨어남은 자동적으로 흘러가던 삶과 세계의 정지를 함의한다. 자동적인 삶, 혹은 삶에 매몰되는 삶과 홀연 깨어난 정신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이 있다. 그러나 이 간격의 경험과 더불어, 서정시의 독자는 그저 아 이 시 참 잘 씌어졌구나하고 시편을 객체화하며 감탄하고 마는 것이 아니요, 그 시편의 시적 환기력을 자신의 실존의 지평에 거두어오며, 그 거두어온 힘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삶을 다시금 돌아본다. 이를테면, 이성복의 한 시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파랗게 싹을 내는 겨울 보리,

밟아도 밟아도 고개 들이미는 겨울 보리 [10]

 


혹자는
밟아도 밟아도 고개 들이미는때문에 이것은 순수 서정시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정抒情이란 말은 감정[]을 편다[]’는 말이다. 겨울 보리를 볼 때 그것이 마치 밟아도 계속 고개를 들이미는 것처럼 어떤 이에게 느껴진다면, 그러한 느낌 또는 감정이야말로 그 사람의 순수한 서정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밟아도 밟아도 고개를 들이미는그 겨울 보리는 파랗게 싹을 내는 겨울 보리다. ‘고개 들이미는 것싹을 내는 것’ – 이 둘은 이 싯구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싯구를 읽을 때, 독자는 그저 겨울 보리의 그러한 성질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의 푸르름, 자신의 저항성 역시 생각하게 된다. 시적 언어의 재현적인 그러나 동시에 상징적이고 환기적인 성질 탓에 독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나아가, 사르트르가 말하듯, 언어란 본디 생략적인 것이고, 메를로 뽕띠가 지적하듯, 언어란 본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 [11] 문학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여 문학의 언어란 그 본질 상 일종의 침묵인 것이요 [12] 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여, 시란 일종의 우수한 벙어리 담화인 것이다. [13] 그리하여 이 두 행의 침묵으로부터 의미를 생산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언제나 시적 환기의 순간을 경험 중인 특정한 독자 자신의 정신인 것이지, 작가에 의해 확정된 의미가 두 행 속에 미리 담겨 있고 그 의미를 독자가 차후에 발견/흡수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독자가 찾아야 할 (숨겨진) ‘보물이 아니며, 독자가 풀어야 할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성복의 겨울 보리의 의미도, 한용운의 의 의미도 정답이 있어서 찾아야 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환기하는 과정 속에서, 독자가 환기하게 되는 것은 그런데 언제고 더 나은 삶의 상태, 더 개선된 삶의 상태, 더 아름답고 고매한 삶의 상태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더 나은 곳/더 드높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이 인간의 근본 지향이지, 더 나쁜 곳/더 저급한 곳으로 퇴락하려는 지향이 인간의 근본 지향이 아니다. 더 낫고 더 드높은 삶을 시를 통해 환기하는 독자의 정신은 그리하여 거창한 것은 아닐지라도 모종의 이상理想으로 열려 나가는 정신이지 다른 정신이 아니다.

 

 사태는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서정시에서 시인이 구사하는 시어 자체는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늘 일상 언어(랑그)의 초월로서 제시된다. 그 시어는 단지 멋진 시적 언어가 아니라 사물과 현상을 지시하는 일상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인 것이요, 그리하여 사물과 현상을, 그리고 그것에의 경험을 새롭게 다시 보도록 독자를 이끈다. 시어 자체의 새로움이 시의 독자를 새로운 감각과 인식의 지평으로 인도하는 것이요, 이 새로운 지평의 경험은 여기 있는 삶을 넘어 더 나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소망에 극히 조화롭다. 여기 있는 삶을 넘어간다는 것은 그런데 언제나 여기 있는 문제적 사태를 넘어감을 함의한다. 서정시 자체가 여기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문제 해결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언어는 분명 문제를 인식하고 지양하는 정신과 잘 어울리며, 그 정신을 가치 있는 것이라 은밀히 말해주는 기이한 언어인 것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시 자체의 환기력이 존재Being에 대한 환기력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시어 자체가 지닌 환기력이란 분명 현재의 문제 사태의 인식과 지양의 환기력인 것이다.    

 

 김우창에 따르면, 이러한 사태는 시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 어떤 문학에서도 발견된다. 그에 따르면, 문학의 언어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삶의 움직임과 일체가 되려고 하는 언어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것이 언어이기에 삶에서 일정하게 떨어져 있을 수밖에는 없다. 즉 문학의 언어란 삶과 일체가 되려 하지만, 결코 그러할 수는 없는 무엇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적 사태는 극히 답답한 일이면서 또 우리의 은밀한 구도에 맞아 들어가는 일이다. 우리는 삶의 직접성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14] 그것이 심미적인 것인 한, 문학은 삶에의 지향과 거리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놀이[15] 인 것이다.

 

   요컨대, 참다운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되는 현실 사태를 (그것이 독자 개인의 현실 사태이든, 독자들, 즉 우리들의 집단적 현실 사태이든) 그대로 유지conserve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절대 될 수 없다. 일부 진보적인 문학이 아니라 문학 자체가 정치적 보수파conservative party (나아가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사회라는 기계 자체와)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우리 중 죄 짓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우리 중 그러한 죄/폭력/욕망/번뇌의 임자가 아닌 인간이 대체 어디에 있으랴!’ 식의 허무주의적 탄성으로 끝날 뿐이며 그리하여 결국 문제적 사태를 위로와 위무로서 봉합하는 데 기여하는 문학이 있다면, 그것은 기실 악마적인(나쁜) 문학 혹은 비-문학이며, 결코 참다운 의미의 문학이 아닌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문학이 참다운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과 세계의 자동성을 멈추게 하고, 인간과 세계의 보이지 않는 차원, 가능한 차원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는 없다. 가능성의 차원과 엉켜 있는 세계의 전체상 혹은 실상을 보여주는 무엇일 수밖에는 없다. 문제적 사태를 초월할 새로운 가능성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무엇일 수밖에는 없다. 정리하자면, 이 삶의 전체 실상을 보고자 하는, 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인식의 열망, ‘삶의 열망을 저의 존재 자체로서 우리로 하여금 재확인하게 하면서 이와 동시에, 이 삶을 새로이 바라보고(인식하고) 일신一新(개선)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사해 주는 정신의 작품 바로 이것이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다.

 

    독자-개인의 지평에서 보면, 문학 독서를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시각의 거머쥠은 바로 자신의 존재의 새로운 형성을 의미한다. 의 현상학자 바슐라르Bachelard가 시 읽기가 하나의 창조가 될 때, 시를 읽는 나는 내 존재의 새로운 형성을 경험한다고, 시라는 표현이 독자의 존재를 창조한다고 말했을 때 [16], 그가 역설한 것 역시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을 써보겠다는 순수한 정신이란 심미적으로/ 도덕적으로/정치적으로 더 훌륭한 지경, 더 고매한 지경을, 새로운 삶의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과 사색을 통해서 모색하는 정신과 완전히 동일한 정신이다. 그 삶의 세계는 그런데 창작자인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너와 나의 세계, 즉 우리의 세계다. 그리하여 내가 쓸 때, 나는 그저 나의 주관적인 느낌과 생각을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비밀 코드로 외면화하는 것이 아니요, 나의 글쓰기 행위/창조 행위를 통해서 나의 삶이 아닌 삶들 속에 정착하고, 그 삶들과 대면해 서로를 소개시키며, 그 삶들을 진리라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공존할 수 있게 만들고, 그 모든 삶들에 대해 책임 있는 상황에 처해서, 어떤 보편적 삶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17] 즉 나는 쓸 때, 보편적 삶의 지평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잘 모르는 방식으로 이미 도약하며 쓰는 것이다. 진리라는 하나의 질서가 중심추가 되는 보편적 삶의 지평이란 우리 모두의 삶에 관계하는 공동적 삶의 지평이요, 이 지평의 다른 이름은 역사의 지평, 문명의 지평이다. 좋은 문학이 곧 좋은 역사와 문명을 직접 창조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역사와 문명을 가능한 것에의 시선과 더불어 더 드높은 것으로 창조해가는 인간 정신의 힘이 벼려지는 정신의 공간은 바로 문학의 공간이다.

 

   이란 무엇인가? 은 무늬이자 문학이자 문명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가슴팍 그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고매한 인격과 삶과 문명[집합적 삶]에의 지향’, 그 오래된 지향의 흔적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고매한 지경, 고매한 나날을 지향하지 않은 작가는 문인文人이 아니며, 문인文人은 작가의 이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상理想이다.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549-558면)




[1] 시라가와 시즈카, 위의 책, 42-43

[2] 시라가와 시즈카, 위의 책, 43-44

[3] 최명희, 혼불 4, 1996, 144-145. 이를테면, 율곡 이이의 시호는 문성文成, 지봉 이수광의 시호는 문간文簡이었다.

[4] J. P. Sartre, What is Literature?, 2001, p. 46

[5] Sartre, 같은 책, 같은 면

[6]  김준오, 시론 [4], 2000, 80

[7] Sartre, 같은 책, p. 43

[8] Sartre, 같은 책, p. 44

[9]  Sartre, 같은 책, p. 47

[10] 이성복, 그 여름의 끝, 1990, 101

[11] Sartre, 위의 책, p.51; 메를로 뽕띠, 위의 책 24

[12]  Sartre, 위의 책, p. 32

[13] W.Y. Tindall, The Literary Symbol, 1955, p. 7 김준오, 시론 [4], 77면에서 재인용

[14] 김우창, 심미적 이성의 탐구, 1992, 19

[15]  김우창, 자유와 인간적인 삶, 2007, 15

[16]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옮김), 공간의 시학, 2003, 51-52

[17] 메를로 뽕띠, 위의 책,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