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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交 – 사귐에 대하여

by 유동나무 2011. 4. 4.

 

(Jiao/) Associate, Fréquenter, Umgang, Frequentare, Frecuentar, 사귀다

+ [ ]. 은 사람[], [ ]은 두 사람이 서로의 종아리를 엇건 모양을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두 사람이 만나 벗트다, 사귀다, 관계 트다, 관계 맺다는 뜻을 로 나타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두 사람이 서로 언동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또는 서로의 언동을 섞음으로써 관계를 맺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나와 남과의 대화적 관계 맺음을 함의한다. 교배交拜는 두 사람의 맞절이요, 교수交手는 둘의 손 맞잡음이요, 교유交友는 벗틈 혹은 벗튼 이인 것이다. 교역交易은 물건의 매매요, 교합交合은 둘이 뜻 또는 육체를 하나로 합함이요, 교분交分은 서로 사귄 정인 것이다.

 

그러나 는 사람의 선의, 호의에만 기초하는 관계 맺음, 선의, 호의에만 기초한 특정 존재 형식은 아니다. 즉 모든 교가 친교親交인 것은 아니다. 는 우정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함의하나, 그것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없이는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존재론적 본질 또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성질은 사람의 필연적인 지향에 있다. ‘ 지향은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요, 본능적인 것이요, 존재론적으로 만인에게 정위定位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직관에 의해, 본능에 의해 알고 있다. 사람의 행복은 바로 에 있다는 진리를, 사람의 생물학적, 문화적 생존은 에 기초한다는 것을. 사람의 모든 바쁜 일, 즉 비즈니스business 역시 그 기초는 .

 

그러나 이러한 진리에 대한 앎이 그 앎의 당자 모두를 의 높은 윤리 원칙이나 의 기율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실존의 뿌리에 있는 지향’, 에의 충동은 자신과 일정한 테두리 내의 소수자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윤리 원칙에 종속되고 포섭된다. 사태가 이렇게 될 때 는 나와 내 동아리 내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만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막연한 다수의 타인을 향한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지향은 이 행복의 원칙에 의해, 이 원칙의 채찍에 의해 가축처럼 길들여진다. 그 지향성은,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암묵적인 내리-가르침에 의해, 감옥과 병원이라는 격리 시설의 존재를 통해 현시되는, 세계에는 있어서는 아니 될 악인, 병인, 위험한 사람들이 있다는 암묵적이고 은연한 사회적 교시에 의해, 지속적으로 억압되어, 일정하게 변형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러한 가르침과 교시의 세례를 받고 스무 살이 된 청년은 프로그램화된 의 기율이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고착되고 틀에 박힌 의 기율의 임자가 된다. 그 프로그램화된 기율은 너와 네 가족, 네 친구 동아리 등속의 일정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한에서, 의 가능성을 찾으라고 일러준다. 그것이 행복에의 지름길이라 말해준다. “너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에게만 너도 호의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이제 이 기율의 임자 혹은 수인囚人이 된 이는 자기의 사랑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특정 테두리를, 그 테두리가 위협받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넓혀나가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상호 인정이라는 의 온기만이 아니라 상호 배제라는 차가운 칼날이기도 함을 배워간다. 자신의 확장을, 확장의 기율을 위협하는 이 또는 자신의 사랑이 가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이 또는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자신의 삶과 존재의 스타일에 호의적이지 않은 이를 그는 그 과정에서 계속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특정 동아리 내 사랑의 온기가 나의 행복을 보증한다는 작은 사랑의 이데올로기’, 이 동아리 확장에 포섭의 원칙만큼 배제의 원칙 역시 중요하다는 포섭과 배제의 이데올로기의 수인으로 이 생을 살아간다. 끊임없이 내 편을 찾으라고, 내 편을 넓혀나가라고 내 귀에 속삭이는 것도 다름 아닌 이 고약하고 흉측한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조금만 내가 주의 깊게 나의 생명됨이라는 현상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다면, 명상해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나날살이가 내가 배제의 영역으로 규정짓고 있는 영역 내의 숱한 익명의 타인들, 나아가 내가 건축한 온정 어린 의 태양계밖에 존재하는, 내가 직접 만나거나 알고 있지는 못한 숱한 타 생명체들의 활동 덕분에 비로소 가능하다는 진리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사전은, 이 사전의 편찬자가 참조했을 숱한 다른 사전들의 편찬자들, 그 편찬들에 참여했던 이들, 인쇄공들, 인쇄 기계의 생산자들, 제철 노동자들, 그들과 관계했던 운송 노동자들, 그들에게 먹을 거리를 제공했던 그들의 아내들, 그들의 차량 내 엔진들, 그들의 차량에 공급되었던 석유, 석유 추출, 가공, 수송자들, 사전에 달려 있는 초록색 실의 제조에, 종이의 제조에 참여한 이들, 숲의 수목, 그 수목에 불던 바람, 그 수목이 흡수한 이산화탄소와 지하수, 물과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더 거대한 것. .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타 존재자들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이런 식의 관점으로 다른 사물들을 보기 시작할 때, 이러한 관점에서 내 앞의 마호가니 책상으로,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로 시선을 옮겨볼 때 내게 드러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진리, 즉 나의 생태적/문화적 실존 자체에 세계의 공동 작업이, 를 수반할 수밖에는 없는 나와 타자들과의 공동-존재됨이 물처럼 스며들어가 있고 실처럼 직조되어 있다는 진리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진리는 나는 늘 익명의 숱한 타자들과의 의 관계로서만 존재함이라는 진리를 말해준다. 이것은 단지 내가 남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 말은, 뭇 남들과의 없이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서의 나의 존재 자체가 아예 성립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내가 배제의 영역으로 밀어 넣은, 미지의, 뭇 남들과의 야말로 나의 절대적 존재 근거라는 말이다.     

 

이러한 진리에 통하여 보면, 위에서 말한 자아自我라는 구심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작은 사랑의 이데올로기’, ‘포섭과 배제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데올로기인지가 확연히 우리 앞에 드러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나날 살이의 연극은, 우리가 얼마나, 인간의 이라는 존재론적 본질에 무지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떤 착각 또는 환상이 이 무지의 뿌리인 것이다.

 

이 존재론적 본질을 깨우친 자에게 나타나며, 점차 익숙해지는 의 보다 높은 기율은, 그 깨우침의 당자에게, 감사와 겸애兼愛를 속삭이고 가르친다. 이 감사와 겸애의 대상에 한정선은 없다. 그 기율은 아울러 만남을 두려워 말라고 가르치며, ‘너의 좁은 동아리, 너의 그 안락한 소우주, 소왕국의 벽담을 바수어 버리라고 말한다. 그 기율은 그 기율을 가까이 하려는 이에게 마치 어린아이처럼 뭇 타인을, 뭇 생명체들을 만나라고 일러준다.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667-67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