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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屈 – 굴종에 대하여

by 유동나무 2011. 4. 27.

(Qu/) Bend, Courber, Biegen, Curvare, Doblar, 굴하다      

돌이는 본디 고리 백정으로 고리만을 만들어 파는 일만 해보았지 짐승 잡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돌이가 소 잡는 백정 딸에게 장가를 들고 그 집 데릴사위 노릇을 하게 되어 생외 처음으로 소 잡는 일을 구경하게 된다. 그 일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날 잡기로 되어 있던 것은 커다란 암소였다. 포줏간의 피비린내를 맡은 암소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포줏간 안에 들어가지 아니하려고 고삐를 몇 번 치며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나 주인이 세차게 다그치자 그 기에 눌린 나머지, 주인이 이끄는 대로 몸을 옹송그리며 포줏간 안으로 들어가고야 만다. 일변, 이제는 죽는구나, 하는 직관적인 깨앎이 소의 눈에 역력하면서도, 다른 일변, 저항의 몸짓만 몇 차례 내보일 뿐, 종국에는 죽을 자리로 힘없이 끌리어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돌이는 이것이 의아하였다
. 돌이의 생각엔 그 몸집과 힘을 생각해볼 때, 마음 먹고 힘껏 날뛴다면 목숨 보전만은 어떻게든 할 성싶은데, 그 힘을 한번 힘껏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사지死地로 끌려가 제 목숨을, 자신과 같은 일개 생명체일 뿐인 인간의 손에 내어주고 마는 그 암소란, 불쌍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그래, 자기 목숨이 그 주인에 대한 충심忠心보다도 더 중하단 말이냐. 대관절 목숨에 상하귀천이 있단 말이냐. 제 목숨 귀중한 줄 모르는 너는 차라리 죽어 마땅한 존재이지 않으냐. 이것이 돌이의 생각이었다. 왜 돌이는 이와 같은 모진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평소 그에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남 앞에의 부당한 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그 자신 그토록 증오하던 부당한 의 태도를 그 죽어가는 암소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돌이가 그 소의 주인 딸에게서 아들을 낳으니 바로 그 아이가 꺽정이었다. 벽초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이야기다
.[1]

 


임 돌은 암소의
에서 인간의 을 보았다. 백정이 상민에게 굴하고, 상민이 약반에게 굴하고, 같은 양반이라도 권세 없는 이가 있는 이에게 굴해야 목숨과 위신을 보중할 수 있었던 조선조 신분제 사회의 질곡을, 그 사회 체제 안에서 목숨과 위신을 보중하며 살아야만 하는 저 자신의 의 운명을 보았다. 그러하기에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보고 하고 마는 정신의 임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저러한 정신의 임자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는 그토록 이것을 증오했던 것일까? 과연 은 그 자체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무엇일까? 의 합성자다. 일설에 의하면, 는 구부러진 꼬리를 그린 것이고, 은 발음 기호다. 는 꼬리를 구부리고 내린 것으로 승복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란 꼬리내림이다. 그리하여 굴수屈首는 머리 숙임이요, 굴슬屈膝은 무릎 꿇음이요, 굴신屈身은 몸을 굽혀 승복의 뜻을 나타냄인 것이다. 굴욕屈辱은 굴하여 치욕을 당함이요, 굴종屈從은 뜻을 굽혀 복종함이요, 비굴卑屈은 남에게 굴종하되 그 모양새가 천박함인 것이다. 요컨대 은 자신보다 더 큰 힘 혹은 세력, 혹은 더 높은 권위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 뜻 등을 꺾고 자신 혹은 자신과 관계 있는 것의 처분을 그 힘/세력/권위의 주인에게 맡기는 모양과 태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 낱말은 그 자체로는 윤리적으로 나쁘다, 좋다, 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낱말이다. 승복하는 태도는 오히려 필요한 것이요,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오직 하는 상황의 컨텍스트만이 그 이 할 만한 인지, 가치 있는 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이다. 임 돌, 그리고 그의 아들 임꺽정이 증오한 것은 그렇게 해야 할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 없이 을 강요하고 그 강요에 屈하는 태도였다. (합리적인 근거가 아닌) -합리적인 근거로 (너의 본디 핏줄은 그러하니까! – 라는 설명으로) 屈을 강제하고 강요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이
은 이조 시대의 한 백정의 이슈만은 아니다. 맑스는 자기 딸의 질문,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굴종이라 답한 적이 있는데, 19세기의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에게 해야 했던 굴종은 21세기의 오늘날에도 반복되어 목격된다. 그러나 굴종의 이슈는 비단 노동자-자본가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실상인즉, 굴종은 권력이 작동하는 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목격되는 현상이다. 권력이란 권력의 주체가 권력의 피-주체(대상)를 굴신屈身케 하고 굴종屈從케 하려는 힘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겠다는 것이 무엇이 나쁘랴. 타자의 삶, 타자의 시간, 타자의 주체성에 개입하여, 그 삶, 시간의 주인 행세를 하겠다는 것,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주체성을 그를 통하여 실현하겠다는 것 (타자에게 내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나쁜 것이다. 권력은 오직 그 행사를 당하는 피-주체(대상)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다. 이 정당성 인정의 컨텍스트가 없을 경우, 권력은 그 자체로 악이다.   

 


오늘날
, 우리네 나날 살이의 영역에서 권력 행사의 욕망을 (그리하여 권력을) 작동시키고 있는 현대 사회의 기제는 강고하다. 관료제bureaucracy가 있는 곳에, 서열제hierarchy가 있는 곳에, 사람 간의 상하上下의 차이를 두려는 그 모든 사회적 조직체에, 선천적 [그리고 후천적] 능력과 소질의 차이가 그 상하의 질서를 정당화시켜준다는 논리가 활개치는 그 모든 사회적 만남의 장소에, 남을 굴종케 하여 나의 주체성을 실현하려는 마음의 괴물은 꿈틀대고 있다. 그 괴물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넓게, 너무나도 촘촘히 사회에 퍼져 있어, 우리는 차라리 그 마음의 괴물이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은 아닌가, 사람 살이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은 옳은 것인가, 그런 것인가? 만일 우리 모두가, 그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행사되는 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되고 있는 것이라고 동의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의 괴물이란 실상 괴물이 아닐 것이요, 극히 자연스러운 것, 사람 살이에 꼭 필요한 것이리라. (,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사회적 삶의 공간에서, 성숙된 인간만이 있는 사회적 삶의 공간에서, 권력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요 긴요한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삶은 그러한 세상과 삶이 아니다. 정당성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한, 또는 제대로 받지 못한 권력이 행사되는 세상과 삶의 장소에 우리는 자주 있는 것이다.

 


임돌의 정신
, 임꺽정의 정신은 바로 이 정당성 인정을 (아예 또는 제대로) 받지 못한 권력 체제를, 그리하여 비합리적인 屈 강요 체제를 절대 자신의 삶의 세계로서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신이다. 사람 간의 부당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않고 문제 삼겠다는 절대적인 정신이다. 그것은 불굴의 정신, 평등의 정신이다. (강요되는 굴욕에) 저항하는 정신이요, (굴욕당함, 저항하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는 정신이다. 불굴과 평등과 저항과 회오의 정신의 밑절미가 되는 정신은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남에게, 세상에게 승복하지 않겠다는 고집이나 아집이 아니라, 자기를 존엄한 존재로서 유지하고, 타인의 존엄을 자신의 존엄과 함께 지키려는 존엄 수호의 정신이다. 일신一身의 안위를 위해서 쉬 권력에 굴종하고, 불평등을 문제 삼지 않고, 저항의 요청에 무관심하고, 양심이 시키는 회오의 마음을 스스로에게서 은폐하는 범박한 현대인의 정신 그 정극편에 그러한 정신은 있다.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524-528)   

 





[1]  홍명희, 임꺽정 1, 1995, 21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