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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戲 – 놀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의 존재론 4

by 유동나무 2011. 4. 17.

(Xi/) Play, Jouer, Spielen, Suonare, Tocar, 놀이/놀다   

일설에 의하면, 앞의 것은 창spear을 나타낸다.  뒤의 것은 위의威儀를 지킴을 나타낸다. 위의란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 낱말의 원형적인 뜻은 무위武威를 보이는 것’, 무사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 가설이 참이라면, 이 낱말은 아마도 고대 중국의 한 풍습으로서의 행사였을 것이다. 무사들의 집단무集團舞로서, 일상이 아닌 여가 시간에 대중들에게 무사들의 훌륭함을 보이는 행사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시간은 곧 유희의 시간, 놀이의 시간이었을까? 이 낱말은 오늘날 놀다, 희롱하다(실없이 놀리다), 힘 겨루다, 놀이, 장난, 연기, 연극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힘 겨루기는 실속 있는 행위가 아니며, 오직 여가 시간에만 장난으로 해볼 만한 행위라는 점에서, 이 낱말의 핵심은 곧 실없다, 장난하다, 놀다이겠다. 즉 이 낱말은 삶의 엄숙함, 진지함, 삶의 즉각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해보는 행동과 관련된다. 희담戱談은 실없이 해보는 담화이며, 희문戱文은 실없이 잘난 삼아 쓴 글, 익살로 쓴 글이고, 희언戱言은 익살로 하는 말, 즉 우스개 소리인 것이다. 희완은 장난으로 가지고 놂이요, 희작戱作은 장난 삼아 지어본 글이며, 유희遊戱는 즐겁게 놀며 장난함(북한 말로는 놀음놀이)인 것이다. 장난은 주로 어린아이들이 재미로 하는 짓이거나 심심풀이 삼아 하는 짓이다. 요컨대, 라는 낱말에는 현실에서의 삶의 직접적 필요성과는 관계 없는 행위를 하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무관한 모든 행위가 장난이며 놀이인 것은 아니다. 장난 또는 놀이에는 반드시 재미혹은 즐거움이라는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놀이, 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니까 노동 시간이 아닌 여가 시간에나, 괜히, 실없이, 재미 나자고, 즐겁자고 해보는 짓이다. 놀이play의 연구자 호이징하Huizinga는 이 중에서 바로 이 재미fun’의 요소야말로 놀이의 에센스라고 말한다. [1]

 

 

호이징하에 따르면, 놀이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그것이 자유로운 행위이며, 또는 자유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 어떤 물리적인 필요, 도덕적 의무에 의해서 우리가 노는 것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과제task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놀이는, 그에 따르면, 절대 자유로서의 놀이인 것이다. 두 번째 놀이의 특성은 그것이 실제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실제의 일상 생활, 삶으로부터 일정한 퇴각이며, 특별한 시공간에 만들어진 특별한 삶 (혹은 행위)’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삶 아님으로서의 특별한 삶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바대로, 인간의 삶이 만일 인간의 필요need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면, 호이징하는 놀이야말로 이 삶의 필요로부터의 퇴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호이징하는 말한다: 놀이는 우리의 나날 살이라는 음악에 끼어 있는 간주곡interlude’이다. [2]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놀이의 성질에 대해서 절반밖에는 말해주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만일 고대 중국에서 가 무사들의 위엄을 일정하게 보여주는 집단무集團舞였거나 그것과 비슷한 행위였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동작의 기율이 슴배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 기율이 그 동작의 특정한 풍격風格과 기품氣品과 미를 창조해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기율은 현대의 모든 놀이에서 기초 원리로 작동하는 규칙rule인 것이며, 그 풍격, 기품, 미는 놀이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특정 가치들일 것이다. 놀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저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재미 없는 놀이란 놀이가 아니겠지만, 재미에 더하여 우리가 놀이를 통하여 추구하는 다른 무언가가 분명 있다. 호이징하는 그 무언가의 실체가 바로 미라고 말한다. 호이징하에 따르면, 놀이는 미, 숭고함의 절정체가 될 수도 있는 것으로서, [3] 질서와 더불어 한계성 속의 완전성이 된다.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이 있다”. [4] 그런 의미에서 놀이는 심미적인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호이징하의 입장이다. 심미적인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성질인 특정 형식을 통한 창조가 놀이에도 역시 발견된다는 것이다.

 

 

사실인즉 아이들의 놀이와 우리 어른들의 창조 사이의 경계는 뚜렷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창조성은 어린 시절의 놀이의 경험으로부터 성숙 배양된 것이며, 어린 시절 놀이의 핵심적 가치와 즐거움은,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이 말하는 것처럼, 어른 시절의 예술의 그것들로 변형/전화될 뿐이다. 위니콧에 따르면, 어린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은 공감empathy라는 특별한 기술인데, 이러한 기술을 어른들은 예술을 통해서 계속 반복 학습한다. [5] 위니콧은 평생 어린 아이를 치료하고 상담하는 일을 어린이 연구와 병행했던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어린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타자성otherness를 실험하는데, “타자와의 직접 만남이 흔히 그러한 것보다 덜 위협적인 방식으로타자성을 실험한다. [6] 즉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아이는 (그리고 어른들은) 타자와 서로 만나는 법, 대화하는 법, 공감하는 법을 배워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의 대인 관계 능력 (우정, 사랑, 정치적 능력) 형성에 놀이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놀이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놀이의 가치란 결코 어린 시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놀이든, 어른이 되어서 하는 (놀이의 승화로서의) 창조든, 우리가 그것들의 반복 경험을 통해 마음 깊이 기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빼어남이다. 우리가 놀이를 구경할 적에, 우리는 놀이에 참가한 이들players의 빼어난 기술prowess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것을 간접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놀이에 직접 참가할 적에, 우리 역시 그 빼어난 기술을 관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놀이는 그러므로 놀이 참가자들players의 빼어난 기술에 대한 시험testing이기도 하다. [7] 호이징하에 의하면, 그러한 놀이는 긴장을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8], 이 빼어난 기술은 바로 이 긴장 해결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이 빼어난 기술prowess을 놀이에서 기대한단 말인가?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고상함, 이상理想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삶에서 나타난 긴장을 해결하는 기술을 간접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상함, 이상이라는 가치의 확인 없이, 긴장 해결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놀이는, 그리하여 삶의 본원적인 필요로서 우리 모두에게 인식된다. 그것은 삶의 직접적인 필요는 아니지만,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삶의 필수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놀이는 이상적인 빼어난 기술의 전시이며, 긴장 해결 기술의 전시인 동시에, 기성성을 초월하고 기성의 결정된 질서를 깨트리려는 정신의 용출 과정이기도 하다. 놀이는, 호이징하를 계속 인용하면, “정신의 용출이 우주의 절대적 결정 상태를 깨트릴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놀이의 존재 자체가 인간적 사태의 논리 초월적인 성격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9]  달리 말하면, 더욱 고상한 것, 더욱 이상적인 것을 향한 정신의 기성성 초월 움직임을, 모든 창조 과정에 깃들어 있는 본원적 초월성을, 놀이라는 놀라운 사건은 보여준다. 놀이는 기성의 놀이 기술에 화합하면서도, 동시에 그 기술을 넘어서려는 몸짓을 허용하고 권장한다. 놀이는 규칙이라는 한계성의 틀 내에서의 창조 에너지의 자유 분방한 용출을 허용한다. 놀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규칙에의 순종을 통한 자유로운 기술/에너지 표출이라는 역설이다.     

 

 

놀이하는 이player가 그 기술/에너지의 임자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이가 놀이의 궁극적 생산 주체가 아님이 지적되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가다마처럼 놀이play 그 자체가 놀이의 주체이고, 놀이의 참가자player는 놀이 속에서 실존적 개성을 지닌 한 인격적 존재자이자 일상 행위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오직 놀이에만 온 몸으로 봉사하는 특별한 존재자로 탈바꿈된다고 말해야 한다. 호이징하에 의하면, 놀이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더불어 그 자신을 감싸길 좋아한다. 또 그는 이러한 비밀스럽고 특별한 행위로서의 놀이의 표현을 담당하는 것은 바로 의상이라고 말한다. [10] 제의나 페스티벌이 놀이의 일종이고, 놀이의 원리를 구현한 행사임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행사 참가자들players은 의상을 통해서 자신을 보통 존재자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자임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한 옷을 입은 이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다른 존재자로 인식되기 마련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무당이나 무희는 특별한 의상을 입어왔던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존재 탈바꿈을 함의한다. 탈을 쓴 이, 특별 의상을 입은 이는 이제 일상의 존재자가 아니며, 이제 그이는 놀이(=제의, 페스티벌, 경기, 게임)에 자신을 봉사하는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놀이의 실질 주체가 놀이하는 이들이 아니요, 놀이하는 이들은 오히려 놀이의 주체 그 자체인 놀이에 봉사하는 이들이라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여주나? 이것은 창조와 창조성의 비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창조는 사람을 통해서 발생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창조의 실질적 주체는, 엄밀히 말해서, 언뜻 보기에 창조물을 만들어낸 사람 개인(=저자, 예술가)이 아니다. 작품 창조의 기원은 절대 그 개인에게만 귀속될 수 없다. 그 기원이 개인에게 철저히 귀속된다는 아이디어, 그리하여 그 개인 창작자를 마치 신[=창조주]처럼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순전히 19세기 낭만주의Romanticism 시대의 아이디어로, 이러한 생각은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것이다. 19세기엔 자본주의 기계 물질문명의 압도적인 사회 잠식 속에서 인간의 신성한 존엄성을 여전히 담지한다고 여길 수 있는 존재자가 필요했다. 19세기 사람들에겐, 산업주의라는 문명의 괴물에 대항해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담지한다고 여길 수 있었던 시적 천재라는 관념이 필요했다. [11]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천재로서의 예술가 집단이라는 상상 이미지imaginary.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이미지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더는 그러한 시대여서는 안 된다. (천재라는 상상 이미지를 판매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집단에게 이 이미지는 필요하겠지만) 특정 천재만이 창조성을 누릴 수 있다는 19세기의 상상 이미지는 폐기되어야 한다. 그 대신, 만인이 창조성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인식되고 천명되어야 한다.   

 

 

놀이의 실질 주체가 놀이의 참가자가 아니라는 말은 또한, 창조할 때 창조하는 이는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 채, 그 상실 속에서만 창조물을 세계에 나타나게 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빼어난 기술의 전시 공간이자 즐거움과 신명의 체험 공간인 놀이는 오로지 놀이 참가자인 내가 나를 통히 잊고 놀이의 규칙에만 몰입할 때, 나 자신의 개성의 무화無化 속에서, 놀이에 귀속되고, 놀이와 한 몸이 될 때, 놀이 기술이 시키는 대로만 내가 움직일 때, 내가 놀이 기술에 철저히 복종하는 시자侍者가 될 때, 내게 그러한 전시/체험 공간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은 아르헨티나 축구 팀의 감독이 된 옛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가 다섯 명의 수비수를 제치고 골문 앞까지 빼어난 드리블 솜씨로 전진했을 때 그때의 마라도나는 특정한 개성의 담지자인 개인 마라도나가 아니라, 축구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빼어난 기술을 그 모든 잠재적 놀이하는 이들(=우리들 전체)에게 전시하는 전시자이자, 놀이에 완연히 귀속된 채, 이상적이라고 가정되는 놀이의 규칙과 완전히 일체가 된 놀이하는 몸’, 그리하여 이상적인 몸’, 놀이에 자신을 봉사하는 몸인 것이다. 즉 그는 보이면 좋을 이상적이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된 이인데,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축구장 그라운드라는 놀이의 공간에서 자신을 몰-개성화, -주체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몰-개성화, -주체화가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도록 한 직접적 뿌리는 아니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의 발생은 이러한 몰-개성화와 탈-주체화를 반드시 수반한다. 그 신들린 드리블은 분명 마라도나라는 특정 개인이 한 것이지만, 그러한 마라도나 개인이 보여준 빼어난 기술을 빼어난 기술로 인정하는 사태의 근본 뿌리는 우주에 단 하나뿐인 천재 마라도나 개인이 아니요, 축구라는 놀이를 하는(할 수 있는), 마라도나와 어슷비슷한 몸과 잠재 능력을 지닌 그 모든 이들, 그 모든 아마추어(애호가)들인 것이다. 아마추어들인 우리들이 없다면, 그의 빼어난 기술은 아무러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빼어난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마라도나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심미적인 공동 규칙에 합일한 이, 자신의 주체성을 잊고 그 공동 규칙에만 합일한 이인 것이다. 지금 드리블 중인 그는 우주에 하나뿐인 단독자, 개성적 존재로서의 마라도나가 아니라, 그 모든 축구 애호가들, 우리들 중의 한 명으로서, 축구 유희 삼매에 빠져 있는 이, 놀이하고 있는 이, 하여 우리들에게 그 놀이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이, 우리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이, 그리하여 우리들과 완전히 분리된다고 말해질 수 없는 특이한 존재가 되어 버린 이, ‘나 없는 상태의 주인공으로서의 마라도나인 것이다. 내가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단지 그가 빼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상태의 자유경을 내가 그의 몸짓에서 발견하기 때문이요, 되었으면 하는 나와 현재의 그를 내가 도저히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오직 규칙에 합일한 채 나 없음의 존재 상태에 머물고 있는 이, 그러면서 작품 창작(=빼어난 기술 전시)이라는 희열喜悅경험을 하고 있는 이, 그러나 집단 칼춤을 추며 그렇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이 낱말 에서 보는 것이 아닌가? 애써 키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거기에서 춤 솜씨자랑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오래된 라는 전통의 맥락에서가 아닌가?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378-386면)


 

 



[1]  J. Huizinga, 위의 책, pp. 2-3

[2] J. Huizinga, 위의 책, pp. 8-9

[3]  J. Huizinga, 위의 책, p. 8

[4] J. Huizinga, 위의 책, p. 9

[5]  M. C. Nussbaum, Not For Profit, 2010, P. 101

[6]  M. C. Nussbaum, 같은 책, p. 99

[7]  J. Huizinga, 위의 책, pp. 10-11

[8]  J. Huizinga, 위의 책, pp. 10-11

[9]  J. Huizinga, 위의 책, pp. 3-4

[10]  J. Huizinga, 위의 책, pp. 12-13

[11]  I. Berlin, The Roots of Romanticism,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