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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나희덕, <예술의 주름들>(마음산책, 2021)

by 유동나무 2021. 7. 12.

나희덕 선생님의 예술의 주름들(마음산책)을 펼쳤다.

1부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찢긴 대지를 꿰매다. 내가 편집자였으면 이 1부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하지 않았을까? 살펴보니, 1부의 제목은 레베카 솔닛의 걷기론에서 가져온 것이다. 걷는 사람은 길이라는 실로 찢긴 대지를 꿰매는 바늘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대지를 찢었을까? 그건 석유라고 해야만 한다. 석유가, 석유의 변형체인 아스팔트가 대지를 찢었다. 걷기는 석유문명으로 치달았던 삶을 참회하고,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려는 기도의 몸짓이자 실행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다.

1부는 생태적 인식과 실천을 담았다는데, 3부가 눈을 끌어당긴다. 자코메티와 마크 로스코 그리고 글렌 굴드를 다룬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손은 자코메티를 먼저 펼친다. 145. 그럼 그렇지. <걷는 인간>이라는 조각상이 안 나올 리 없지.

몇 해 전 서울에서 열린 자코메티 전에서 <걷는 인간>알현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하우스에서 열린 자코메티 특별전에서 이 작품을 봤다고 쓰고 있다. 정확히는 1960년 작 <걷는 인간 2>인데, 실린 사진으로 봐서는 서울에서 내가 본 작품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더 이상 한 줌의 흙도 덜어낼 수 없는 그 직립의 형상은 사람 인자의 간결한 선으로 수렴된다. () 마지막 전시실 밖에는 자코메티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도 가볍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이다.” 또 다른 벽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이처럼 걷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중력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나 또한 이 조각상에 관해 걸으면 해결된다 Solvitur Ambulando에서 쓴 적이 있다. 저자의 책을 소개하는 글에 내 글을 첨부하는 것이 결례일 수도 있겠으나 자코메티의 조각상으로 이어진 글의 인연을 기억하고 싶어 옮겨 본다.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인간은 좀처럼 뇌를 쉬게 하지 못하는 우리의 범상한 실존에 퍽 가까이 다가가 있다. 걷기란 삶을 살아가기라는 과업의 은유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오늘도 걷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조각상은 반가사유상처럼 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속세의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또한, 모세처럼 모든 것을 잃고 최종적으로 붙들 수 있는 자기의 몸 하나만 달랑 남았을 때도 인간은 또다시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고 떼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희망의 존재론도 이 조각상에는 일렁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조각상에는 두 사상이 교차하고 있다. 한편으로 문명의 외피를 벗겨보면 이토록 초라한 것이 현대인이니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뼈만 앙상한 무능력한 현대인의 실상을 직시하는 서늘한 시선이 이 조각상에는 번득이고 있다. 또는 현대인 모두가 정신의 헐벗음, 그리하여 존재의 헐벗음 상태에 있다는 시각이 이 조각상에는 출렁이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그 초라한 인간은 다시 걸어가는 한, 걸을 수 있는 한, 헐벗음을 벗어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갈 것이라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믿음이 은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득의得意의 경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