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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에리히 프롬, <불복종에 관하여> (마농지, 2020)

by 유동나무 2021. 2. 14.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의 내용을 잘 모르지만, 책의 제목만큼은 상당히 불량하다. 제목에 나오는 "삶의 무기"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삶"의 무기가 아니라 세상에 처한 개인의 삶의 무기를 뜻하는 것임이 분명하고, 어떤 무언가의 도구가 될 수 없는,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유일한 학문이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철학마저도 유용성이라는 원칙(지배자)의 휘하에 거느리려고 하는 불순한 뜻이 이 책의 제목에 비친다. 이 책의 소개문에 나와 있는 "비즈니스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하는" 철학/사상이라는 문구는 이런 의심을 정당한 것이라 말해준다.

반면, 20세기 (그리고 지금) 인류의 정신적 스승, 에리히 프롬의 <불복종에 관하여>는 철학이 어떻게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안내자가(거칠게 말하면,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철학은 이 세계란 것이 본디 어떻고, 자연이 본디 어떻고 따위를 논하는 "본디"의 담론이 아니다. 그런 것이 철학이라면 그만큼 쓸모 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철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전되고 이어져온 "당대의 세계, 당대의 자연, 당대의 인간의 문제"를 문제로서 드러내며, 모두가 당연시하던 무언가를 색다르게 조명한다. 철학은 해부하고 해체하며 "자, 이것을 보라"라고 말한다. 철학은 불합리한 권위, 당연시, 상투성, 가정에 불복종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프롬은 철학자의 본령이 일종의 불복종 정신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불복종론이 아니다. 시민 불복종 운동을 권하는 그런 책이 아니다. 책의 대표 에세이인 "불복종에 관하여"는 오히려 당대인이 왜 그리 복종에 능숙한지를 해부한다. (그의 분석 태도를 여기 한국에 끌고 와 질문해보면, 이렇게 된다: 왜 한국인은 삼성에, 이마트에 그리 잘 복종하는가? 왜 한국인은 지구에서 거의 유일한 봉건체제인 재벌 지배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20세기 후반 인류사회의 시대적 문제 (인간의 쇠퇴, 주체적 개인의 소멸, 인간의 사물화, 관료의 지배, 영적 전통과 민주주의의 연결고리 파열, 민주주의의 형해화, 생태적 재앙, 그 대안 등)를 깊이 파고든, 책의 4편의 에세이는 현 시점에서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다. 원저가 출판된 것이 1981년이고 원문이 나온 것은 그 이전이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불행이나, 불행을 불행으로 인지한 자에게는 다른 길이 열리는 법이다. "불행하게도" 프롬을 읽는 일이란, 여전히 자기 구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