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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조병준, <퍼스널 지오그래픽>(수류산방, 2021)

by 유동나무 2021. 3. 6.

 

<퍼스널 호모그래픽>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책. 온통 사람 이야기로 가득하니까. 아닌가? 어쩌면 <퍼스널 호모지오그래픽>이라는 제목이 더 낫겠구나. 그가 전하는 사람엔 장소가 끼어 있고, 그가 거닌 장소에는 사람이 묻어 있으니.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지 않은가? “스쳐지나가는 자에게 보이는 건 풍경뿐이다. 그 풍경 속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표정으로 살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207) 이 단 두 문장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집약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풍경의 심부로 들어가 사람을 만나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인 것이다. 아니,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그는 사람 이야기로, 세상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 그러니 <퍼스널 호모소시오그래픽>이라는 제목이 더 나을는지도.

조병준. 그는 왜 그리 사람을 많이 만났고,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한 걸까? (책이 과거에 쓴 글들의 모음이라 과거형으로 쓴다) 사람이라면, 티벳 사람이나 부탄 사람이라면 모를까, 별반 알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정말이지 신기한 노릇이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 복이 많아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그의 문장은 구수하다. 어떻게 글에서 누룽지 향(나는 냄새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질 않어서)이 나지? 마른 누룽지처럼 바삭바삭하고 부슬부슬하다. 화려한 문체나 어려운 어휘, 고난도의 지식이나 사유로 독자를 위압하지 않는다. 도마뱀 같다. , 자기를 낮추고 가만 있는데, 모두가 둘러 모여 구경을 한다. 구불구불 잘도 흘러간다. 아마도 삶의 상호주관성, 인터랙티브한 면모를 체득한 사람의 글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 그는 자기 노출에 능수능란하다. 왜 벗지? 이런 의문은 거둬라. 세상에 비밀이 없는 자가 훌륭한 자라고 천축국의 마하트마는 말하지 않았던가. 얼굴을, 속내를, 집안을 보여주는 포스팅에 좋아요를 주렁주렁 매달면서 그 마하트마의 말씀에 동의를 표하는 우리들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조병준과 나는 상극이다. 대체로 사람을 멀리하고(코로나의 저주는 박쥐와 천산갑들, 오랑우탄들을 죽음으로 내몬 호모 사피엔스들에게는 필연이 아닐까?) 자기가 잘낫다는 망상에 빠져서는 사람에게 차갑고, 누룽지 같은 문장보다는 단풍 같은 문장 쓰기를 즐겨 하고 (아니, 누룽지 같은 문장을 어떻게 쓰는지 도시 알지를 못하고) 독자와 손잡고 동행하는 법을 모르며, 노출을 거의 금기시하다시피 하는 나와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다.

신기한 건, 극과 극인 둘의 공통점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나처럼 육체의 배고픔보다는 영혼의 배고픔”(71)이 더 문제가 되는 종족이다. 글쓰기는 이 배고픔을 해결하는 활동의 부산물일 뿐. , 길 위에 있기를 즐긴다는 점에서 우리는 길의 형제고 순례의 집을 거주할 만한 집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순례의 형제다.

그러나, 이렇게 쓰면 그는 어쩌면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손사래를 칠지 모른다. 지리산을 전라도와 경상도의 산, 한반도의 산이 아니라 지구의 산이라 말하는 자를, 탈인간의 시선으로 이끼를 보고 탈당대의 시선으로 직박구리를 보는 자를, 자연사의 울림 속에서 있는 인간사를 말하려는 자를, 생각의 마을에, 산의 마을에 속하려는 자를, 언제까지나 사람의 마을에 속해 사람의 문제와 함께 하려는 자, 사람과 함께 길을 걸으려는 자라면 꾸짖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