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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이국 취향

by 유동나무 2021. 3. 30.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만년 일기 모음집인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사, 1992)에는 글쓴이가 외국인을 싫어한다고 밝히는 일기가 등장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기술하자면,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의 목록에 김현은 외국인 싫어하기를 스스럼없이 집어넣고 있다. 30년 차이가 이렇게나 큰 것인가? 외국인 좋아하기가 재미있게 느껴지는나로서는 김현의 반-윤스테이적이고, -비긴 어게인적이며, 반 글로벌적인 저 외국인 혐오 감각이 이물스럽기만 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픈 것이냐 하면, 전후(戰後) 국가의 한 에서 태어나 병영 구조를 닮은 국민(초등)학교에서 호전성을 내면화하도록 교육받았던, 그러면서도 1990년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특수한 목적에서만 해외여행 비자가 발급되었던 국가 안에서, 즉 위로도 못 올라가고 바다 건너로도 못 건너가는 물리 환경 안에서 성장해야 했던 이들과 그 후세대들(2000년대생까지를 포함)로서는 이국 취향이 필연의 취향일 수밖에는 없다는 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국 취향, 좀 더 세분화해서 말해서 서방(서양) 취향, 서양풍은 20세기가 채 도래하기도 전에 예수교도를 따라 조선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미군이 조선반도를 점령하면서는 미군을 따라 물밀듯이 들어오지 않았던가. 1980년대에도 있었던 바나나와 초콜릿과 고히와 카페가 이미 충분히 양풍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나의 이국 취향은 한국에 깊이 뿌리내린 채 다른 문화권의 문물을 선택적으로 선호하고 음미하는 식의 특색있는 한국식 생활의 한 취향이 아니라, 한국에 깊이 뿌리내림 자체에 의문점을 찍는, -한국적이고 탈-예맥적인 문화 취향, 중국인-그리스인-코스모폴리탄 되기의 취향이자 폐쇄적 민족주의 해체의 취향이며, 유목의 취향이고, 그런 점에서 이 취향은 탈-예맥적 컨텍스트에서 탈-예맥적 동료 생물들에 의해 감촉되는 가운데, 숨 쉬며 살아갔던 내 한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냄으로써 다시 내게 환기된다.

 

 

 

그러니까 내게는 이를테면 부겐베리아(Bougainvillea),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 소설에서 처음 단어로 만났던 부겐베리아, 그렇지만 나중에 저 중국의 서편에 가서 처음 만났고, 더 시간이 흘러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늘 함께했던, 브리즈번 강물의 푸르댕댕한 빛깔을 배경으로 흰빛을 뿜어내던 부겐베리아 같은 나무가 내 기이한 이국 취향을 확연히 알려주는 상징물인 셈이다.

내 흉중의 바로 그 녀석, 바로 그 부겐베리아를 엊그제 서오릉 건너편 어느 화원에서 모셔 왔다. 그리고 나는 예맥족의 나와바리 바깥에서만 자라는 이 나무와 꽃을 눈으로 쓰다듬으면서 저 김현이 쓴 외국인 싫어하기라는 엉뚱한 구절을 유쾌히, 마음 놓고 비웃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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