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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악의 평범성

by 유동나무 2021. 2. 13.

죽어 명예를 얻은 이의 시집이 아니라 20년을 반지하 방에 살고 있는 어느 현역 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요절하고 마는 숱한 시집들과 나란히 두고 보면, 이것도 흉측한 풍경이 아닐 수 없겠으나, 전체를 조망하는 그런 똑똑한 시선을 거두고 소박한 시선으로 다시 보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기자가 글을 잘 쓰기도 했겠으나, 어떤 근거로 그가 세상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는지, 과연 나 자신은 그 평범한 악의 주체는 아닌지, 알아보고 싶은 내심들도 클 것이다. 하지만, 기사를 봐서는 세상이 걸린 불치병의 내용이 거의 드러나지는 않는다. 무엇이 불치병이고, 무엇이 악일까? 기사에 적혀 있기론, 광주학살 피해자와 세월호 피해자 등에 대한 노골적인 냉담, 조롱, 혐오 같은 것인데, 그게 다일까?

영화 <승리호>도 실은 같은 말로 시작한다. “세상은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치병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병세가 악화되었는지에 대한 질문, 성찰, 탐구는 이 영화에 거의 생략되어 있다. 생태계 파괴와 돈에 대한 탐욕이라는 병증만 드러나 있을 뿐.

 

 

2092, 지구 밖의 세계, 즉 외세계가 지구세계의 삶을 수탈하는 것처럼, 2021년 코로나 시국에도 여전히, 북반구는 남반구의 삶(인간과 자연)을 빨아먹고 산다.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후, 인류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 시대로 돌입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상대로 한 전쟁을 그치고 자연을 상대로 한 전쟁으로, 전쟁 형태를 바꿨을 뿐이다. 그리고 이른바 세계화가 가속화될수록 남반구의 노동력과 자연, 즉 그곳의 은 북반구로 향하는 무역 폭풍”(안드레아스 말름) 속으로 계속 더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북반구는 상품을 수입하며 동시에 남반구 대지도 흡수했는데, 이처럼 북반구로 질질 끌려 들어간 남반구 대지의 양을 측정한 한 연구는, 2007EU가 수입한 상품들이 인도 면적만 한 크기의 대지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안드레아스 말름) 그러나 여기서 대지란 텅 빈 백지 같은 땅이 아니다. 그것은 무수한 생물들의 서식지, 은유를 쓰자면 생물들의 집을 뜻한다.

박정희 시대부터 본격화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근대화(서구화, 선진국 되기)”라는 이곳의 궁극의 이상은, 이러한 수탈 체제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는 강국이 된다는 건 곧 지구의 지배자 대열에 낀다는 것, 오직 그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지배자 체제 안에 편입된 이들은 남반구로부터의 노동과 자연의 이전으로 가능한 제국적 생활양식”(울리히 브란트, 마르쿠스 비센)을 행복한 삶의 기준으로 편안하게 수용하게 된다. 홈쇼핑과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그 무수한 스타일들로 입증되는. 내부(배달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를 식민화하고, 외부(남반구의 노동과 자연)를 식민화하는 삶. 제국적 자본 질서가 아니면 지속 가능하지 않은 해피 라이프.

무엇이 좋은 삶인지, 그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 자신의 삶이 누구의 삶을 짓밟고 성립되는 것인지, 알아보려는 지성이 마비되었다는 것. 반지성이 행복의 절대조건이 되었다는 것. 눈을 뜨는 짓, 전체를 조망하는 짓만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 자신이 투자하는 주식이 지구 어디에서 어떤 힘이 되어,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있는지, 진지충이나 기울일 만한 관심을 거두고 오직 건배한다는 것. (지성이냐 야만이냐!)

내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치병이고, 악의 평범성이다. 시집 <악의 평범성>에 이런 불치병과 악의 평범성이 자세히 관찰되고 탐구되고 있는 걸까? (2021. 2. 유동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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