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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우리 모두의 일, <기후정의선언> (마농지, 2020)

by 유동나무 2021. 2. 14.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소우주에서 살기 마련이다. 같은 시공간에 산다고 믿지만, 그건 믿음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렇게 각자의 지붕 아래 살던 이들이 어느 날, 일개의 바이러스로 인해 한 지붕에 모이게 되었다. 이제 각자는 더 이상 각자가 아니었고, 모두가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압력을 받으며, 공통의 단어들, 즉 봉쇄(lock down), 격리(quarantine) 같은 단어들을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였고, 바이러스와 면역, 박쥐와 천산갑에 관한 공부를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로 받아들였다.

코로나의 지붕이 하나의 작은 지붕이라면, 기후(위기)가 만들어낼 지붕은 거대 지붕이어서, 그 지붕은 태양에 비교할 만하다. 우리가 언제 바이러스나 면역에, 숙주동물에 지금처럼 해박했던가? 앞으로 수년 내에 온실가스나 석유, 재생에너지, 메탄, 영구동토층, 지구기후시스템, 탄소세 등 종래 기후전문가나 환경 분야 종사자들이나 떠들던 이야기들은 “모두가” 떠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기후 문제를 우습게 아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후 문제를 '뉴스'나 ‘문서’에나 등장하는 문제로, 아니 어떤 문제를 지시하는 한낱 기표로, 또는 어떻게든 풀 수 있을 숙제로, 어찌되었든 자기 자신에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 잠재적 재난의 문제로 오해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하나의 문제나 가능성,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무섭게 나타난, 코로나19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괴력으로 체감될 새로운 삶의 여건, 삶의 상수이다.

삶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여기에 대한 대답들 모두를 데려와도 기후 하나와 견줄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의 집필진들이 말하고 있듯, 우리는 이미 “늦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늦어버렸다.”

누가 이 책을 썼을까? 국가를 상대로 한 기후 소송에 앞장서고 있는 프랑스의 한 시민단체다. 즉, 이들의 존재 자체가, 이들의 활동 자체가 기후 현실의 뜨거움을 말해준다. 우리의 서늘함, 우리의 무관심, 우리의 쿨함, 우리의 우매함과 반대되는 의미의 뜨거움이다.

그러나 한반도 거주자들이 기후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수용하지 않는 사태에는 그만한 사연이 충분히 있다. 여기서 1998~2017년의 세계 기후 충격 지도를 담은 사진 자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위 자료는 한반도가 직접적인 기후 충격을 거의 받지 않은 지역에 속함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후위기 가속화와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은 동궤의 것이고, 경제 성장과 행복의 이데아는 대다수 한국인의 마음에서는 분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기후위기는 성장과 행복을 등치해온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파열을 요청한다. 대표적 케이스가 문재인이다. 그의 발언을 보라.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고? 지금도 석유, 석탄 문제에 아무런 “갬성”이 없는 586 맨털리티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방법도 없다.

코로나가 세계를 하나로 묶었듯, 기후도 세계를 하나로 묶을 것이다. 하지만 훨씬 더 강하게 묶을 것이다. 필리핀의, 미얀마, 나카라과와 파키스탄의 고통에 우리는 더는 불감증을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세계는 우리가 쫓아가야 할 제1세계와 한국 그리고 나머지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2019년 기후재난의 피해자로서 현장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활동가가 2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모르고 있고, 그래서 쿨하고 냉정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이 쿨함과 냉정함과 평온함의 다른 이름은 아무 대책 없음, 넋놓고 있음이다.

이 책은 우리를 이런 상태에서 구원해준다. 이 책의 온도가 더워진 지구만큼이나 뜨겁기 때문이다. 우리의 피도 실은 뜨겁고, 지구라는 한 지붕 아래 사는 모든 사람의 피도 뜨겁다. 그걸 다시금 알려주다니, 잘 되고 필요한 글이란 이렇게 뜨거운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