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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장 탈근대 전환

녹색교통 - 유럽의 경우

by 유동나무 2009. 7. 19.

아래에 녹색교통과 관련된 읽을 만한 기사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기사는 유럽의 선사례를 소개하고 있어, 가치가 있습니다만, 글을 쓴 소민호 기자의 글에는 어휘나 사고방식에 약간 문제가 있으므로 먼저 지적하고자 합니다.

우선 "저탄소 녹색 성장"이라는 말 혹은 개념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탄소는 온실가스(GHG) 중 99%를 차지하는 가스를 대표하는 원소이기에, 저탄소는 곧 저온실가스를 말합니다.

그런데, "저-온실가스, 혹은 온실가스 감축을 생각하는 녹색"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장", 즉 경제적 번영을 함의하는 "성장"은 근본적으로 상호 반목/충돌하는 두 가치라는 것입니다. 

제로섬 게임과 같아, 하나가 이루어지려면, 다른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탄소 녹색 성장이라는 말을 쓰는 이들은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녹색도 가능하고, 성장도 가능하다고 그들은 말할 터입니다. 

사실 이런 안일하고 막연한 의미에서의 <녹색>을 싫어하거나 거부할 인간은 있지 않을 겁니다. 누구나 녹빛, 녹음을 좋아하고, 청정한 공기, 물을 좋아하지요. 이걸 싫어할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의 문맥에서, <참된 의미의 녹색>은 인간본위적 사고방식에서의 <인간 복지> <인간적 웰빙>의 가치를 버리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기준에서, <편리하고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혹은 그것을 일정부분 희생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는, <녹색>이 실현될 수 없는 물리적 환경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요청되고 있는, 가치 있는 <녹색>은, 저탄소, 저온실가스, 온실가스 감축,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지향할 때 동반되어야 하는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 전환>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불편한 생활을 근본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덤으로 <녹색까지> 하면 좋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기-기만적인> <자기-모순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혹은 서유럽이나 미국, 호주 등지에서 <녹색 에너지> <온실가스 감축> <지속가능한 개발> 등을 입에 담는 관료들, 정치인들, 학자들,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위와 같이 <녹색>을 기성의 것에 추가되는, <덤으로서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러한 위험하기 짝이 없고, 근거 없는 사고방식이 소민호 기자의 글에도 스며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 요구되고 있는 것은, 편리한 삶에서 <불편한, 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만족스러운>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테크놀로지 의존적 삶에서 테크놀로지에 <덜 의존적이면서 그리하여 더욱 만족스러운>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장하는 이러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려면,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설사, 저와 같은 무명인이 아니라,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치인, 종교인, 학자, 교수, 연애인, 예술인 등이 나서서 제가 지금껏 말한 것을 말한다 해도, 

그 말에 귀기울이거나 그 말에 동의해서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현 한국 정부에서 녹봉을 받아먹고 있는 이들의 안일하고, 근거 없고, 인간본위적인 생각, 즉 <성장도 가능하고, 녹색도 가능하다, 둘 다 되면 좋지 않느냐>는 사고를 

버리고 싶지 않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욕망>에 근거한 하나의 환상적 사고방식이지, 지금 요청되고 있는 <지속가능한 인간 품위, 인류 존속>을 위한 어떤 현실적인 비전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고방식에 매여, <나도 녹색한다> <나도 환경친화야> <나도 이젠 생태주의자야>라는 말을 쉽게 하면서, 녹색도시건설 혹은 녹색교통망건설 같은 프로젝트에 나선다면, 

현 도시, 현 교통체계에서 녹색도시, 녹색교통체계로 이동하는 동안, 가공할 만한 수준의 온실가스가 배출되는 <현실>에 눈을 감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전환을 추구한다면, 그 전환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충당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면, 그 전환에 얼마만큼의 온실가스가 배출되었는지 반드시 측정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안일한 녹색> <덤으로서의 녹색>을 하나의 가치로서 붙들고 있는 분들은 분명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만, 

그러나 

그러나 

한 사회집단으로서의 우리는 현 정부 식 "녹색 성장" 혹은 그보다 조금 낫지만 별로 나은 것은 없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가치나 관점을 통과하여서만, 

인간의 후퇴와 반성, 양보라는 가치를 수반할 수밖에는 없는 참된 녹색 가치에 도달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 사회집단으로서의 우리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알고 만들고자 하며, 소망하는, 미래를 향해 몸을 던지는 존재 - 호모 프로젝티안>이며, 동시에 <호모 에피투미아> (-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멈춤 없이 갈애하는 존재, 라는 말입니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환경 재앙/재난이라는 형태로 우리들에게 드러날, 가이아의 자기정화 움직임은 <호모 프로젝티안>도 <호모 에피투미아>도 용납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죠, 

<호모 프로젝티안으로서의 인간>은 인류의 소멸과 더불어서만 소멸될 수 있는 것임에 비해, <호모 에피투미아>는 그렇지 않고도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인간인 한, 미래를 향해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일, 무언가를 기획해보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반면, 우리는 인간임에도, 일정한 <자기 승화 노력>을 통해 호모 에피투미아적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호모 프로젝티안으로서 요청되는 이상적인 프로젝트는 온실가스 배출을 수반하는 녹색교통체계의 건설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알고 예측하는 것, 그리고 알아낸 것을 공유하는 것, 공유된 앎에 바탕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전지구적 틀에서, 지역적 틀에서 함께, <환경재앙의 잠재적 피해자인 그 모두가 함께> 논의하고 궁리하며 실천 방식과 형식을 모색해보는, 보다 거시적 틀에서의, 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냉철한 시각에서 정확한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배포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그 심각성을 널리 공유하는 보다 거시적인 프로젝트가 녹색교통 체계 건설/개발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점을 알고, 다음 기사를 읽어야 할 것이기에, 이에 몇자 올립니다. 그러나 아래의 기사에는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달리 말해, 지금 요구되는 프로젝트, 즉 알고, 논의하고, 궁리해보는 일에 보탬이 되기에 올립니다.


"탄소배출 세계10위 오명, "녹색 교통"으로 넘자" - 소민호 기자의 글 


* p.s. 호모 에피투미아와 녹색 이야기는 다음 번에 이어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