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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병

by 유동나무 2011. 11. 7.

앤쏘니 키드만Anthony Kdman은 그의 책 [고속 협로에서 제정신으로 살기[제정신 놓지 않기]: 21세기의 정서적 행복Staying Sane in the Fast Lane: Emotional Health in the 21t Century]에서 테크노스트레스technostress’라는 새로운 질병을 말한다. 벌써 그의 책 제목만 봐도, 그가 말하는 테크노스트레스의 실체가 대강 짐작이 간다. 아니 새로운 터치 형 신 디바이스device들의 도래를 목격하고 있거나 체험하고 있는 이들은 이게 무엇일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듯도 하다.  

 

키드만은 우리의 뇌가 변화에 저항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선호하며 최대한 사태를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고전적인 뇌의 성향과 새로운 정보의 신속하고 게걸스러운 흡수를 부추기는 신세계 문화의 충돌이 현대인의 정서 불안, 스트레스의 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몸과 고속의 인터넷과 신 기기 문화 사이에는 일정한 모순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테크노스트레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키드만이 지적하는 현대의 사태는 좀더 세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것 강박증고속 문화. 이 강박과 고속의 문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고속으로 정보의 도로를 달리면 달릴수록,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갈망의 마음 기제는 더욱 활성화된다. 즉 새로운 것의 체험은 만족감과 행복감만 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새로운 것의 체험으로 나아가라고, 다시 한번 그 고속을 체험하라고 그 체험자를 부추긴다. 이러한 사태의 실상을 철학자들의 음성으로 들어보면 이러하다.

 

누군가 이러한 종류의 중독증에 빠져든다 할 때, 이 빠져듦은 함몰의 차원을 지닌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 최신 포스트를 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위기나 소식 또는 재미 있는 소식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그 사람은 최신 업데이트를 기다리며 웹사이트들이나 친구들 페이지를 한 사이클을 돌지만, 결국 발견하는 것은 이 사이클 돌기가 끝났을 경우 지난 번과 똑같이 갈망하고 기대하며 그 사이클을 다시 한번 더 돈다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은 항속적이고 끝을 모르며, 최신 포스트는 당신으로 하여금 더 많이 욕망하도록 만들 뿐이다. 이러한 종류의 중독과 더불어 당신은 다음에 무얼 해야 할지 분명히 안다. 그러나 그 일을 끝내는 일은 당신을 그 길 위에 서게 한 그 갈망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데 실패한다.” (H. Dreyfus and S. D. Kelly, All Things Shining, p. 7)      

 

달리 말해 이러한 사이클 체험은 그 체험으로 인해 한번 들뜨고 조급해진 마음을 계속해서 들뜨고 조급하게 하는 자극력이 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이의 마음은 너무 적은 시간에 너무 많이, 즉 고속으로 접한 정보로 인해 마음의 번쇄를 느끼는 것을 넘어, 계속해서 마음의 조급함과 들뜸을 느끼는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쉬지 못한 마음과 몸의 눅진눅진한 피로, 테크노스트레스다. 새로운 것과 관련되는 뇌의 호르몬 도파민을 흐르게 함으로 그 체험자는 즐겁지만, 이 즐거움은 분명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체험되는 즐거움이다. 즉 최고의 즐거움이 아니고, 급이 낮은 즐거움이다.

 

필자는 신 기기의 체험에 초점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 질 낮은 즐거움에 관해 말해본 바 있지만, 이 발언은 기실 신 정보의 고속 흡수라는 체험의 사태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신 기기도 신 정보도 그 체험자를 만족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지 못한다.  

 

이러한 욕구 충족 시스템 아래에서는 누구든지 끊임없이 만족-불만족이라는 쳇바퀴를 빨리 맴돌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이 빠른 맴돎이라는 과정에서 잠깐씩 맛보는 기쁨의 실체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이러한 기쁨에 익숙해진 인간에게 세계는 대개 지나가고 말며, 음미되지 않는다. 음미 되더라도 그 시간은 극히 짧다. 깊고 실하고 오래가는 기쁨의 경험자는 늘 시간의 정지 역시 경험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기뻐하는 그 즉시 다른 기쁨을 모색해보는 정신에게 시간은 절대 정지하지 않는다.” (우석영, [낱말의 우주: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39-40)     

 

그러나 사태는 결코 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가지 꼭 언급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가 망각을 친숙한 체험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순간만을, 또는 현재와 근미래만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삶이란 기억함을 등한시하는 삶이다. 새로운 것을 체험하기에도 급급한데, 어찌 정신의 에너지를 과거의 사태를 성찰 내지 기억하는 데 쓸 것인가!

 

그런데 정치학자 월린에 따르면, 이러한 망각 친화는 개인의 지평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니다. 고속의 문화, 신속한 변화의 문화, 망각의 문화 속에서 소멸되는 것은 집합적 기억이고, 집합적 기억의 되새김질이고, 나아가 (집합적 죄의식을 가질 만한 사태에 대한) 집합적 죄의식이다.   

 

미래에 고정된 사회, 신속한 변화라는 광란에 포획된 사회는 상실의 결과에 관해, 특히 널리 공유된 적 있는 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법을 알기 어려운 사회다. 변화 중 많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기성의 삶과 신념을 갈아엎고 대치한다는 점에서 파괴적이다. 망각은 규범이 된다.….신속한 변화는 단지 집합적 양심을 무디게 할 뿐만 아니라 집합적 기억 역시 희미하게 한다. 너무나 많은 과거들이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사라진 나머지 시간의 범주 그 자체가 구시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집합적 기억의 부재는 곧 집합적 죄의식의 부재를 의미한다.” (S. Wolin, Democracy Inc, p. 275)

 

만일 사태가 정녕 이러하다면, 새로운 디바이스들로 인해 더욱 활성화된 고속의 새 정보 흡수 문화란 결코 장밋빛 문명의 도래를 함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일종의 디스토피아의 면모를 거느린다. 그것은 개인의 마음을 휴식과 만족 상태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정서적/신체적 질병을 초래하고, 집합적/공동적 양심과 기억을 흐리게 하며, 그리하여 집합적 당위 행동을 둔화시키는 효과조차 지닌다.

 

요컨대, 만일 우리가 전례 없이 신속하게 새 소식과 정보를 얻고 체험하는, 전례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면, 이 전례 없는 즐거움은 전례 없는 질병을 함께 초래하는 즐거움이다. 이 전례 없는 즐거움이 과도하게 찬양되고, 과도하게 체험되는 반면, 이 전례 없는 질병은 과소하게 지적되는 오늘날 화급한 것은 의당 이 질병의 자각이고, 이 질병의 언급이다. 물론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해법을, 치료제를 찾아 나서야 한다. 닥친 위험, 닥칠 위험을 아는 자는 그 위험에 빠지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