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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물에게 준 소리 (22) 온생명 공부는 나 공부로부터

by 유동나무 2011. 8. 3.


2011 8 5, 이번 주 금요일 나사NASA에서는 태양에너지로 발전하는 주노를 목성[주피터]에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주노는 앞으로 만 5년을 이동해 2016년부터 탐사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소식.

 

나사 소속 한 연구자는 이 탐사를 통해 태양계 내 행성들의 탄생 과정을, 그리하여 지구의 탄생 과정을 알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피력했다고 전해진다. 태양계 내에서 태양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덩치를 지닌 행성인 이 목성은 (태양 외 모든 행성들과 달들을 총합해도 이 목성의 질량에 못 미친다고 하는데) 태양 형성 이후 가장 먼저 형성된 행성이라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연구자에 따르면 주노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좀 달리 말하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식은 청자를 사뭇 충격한다.

그리고 우리 청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21세기 첨단과학이, 첨단 우주학이 태양계의 형성 과정도, 지구의 형성 과정도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우주의 처음을, 우주의 형태와 성질을 논하는 과학자들이 태양계 하나조차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주과학자들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하든, 우리는 현 우주과학의 수준이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리라. 나아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주가 아니라 태양계임을, 그리고 우리의 생명과 문명이, 우리의 삶과 다른 모든 생명체들이 태양계 내의 일부로서만 존재하고 있음을, 즉 태양의 피-압력체들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리라.

 

기후변화의 시대, 세계가 하나로 묶여지는 시대-오늘의 시대를 무어라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저 지구의 시대라 불러보면 어떨까.

 

지구의 시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 한가지는 지구 시스템학, 기후변화학, 지구지질학, 지구-엔지니어링, 대양학, 대기학, 태양학, 생물[]학 붐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주제를 다루는 사회과학 못지 않게 자연과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시대라는 [끌게 될 시대라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잘 모르지만, 세계의 추세는 분명 이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거시 학문은 미시적 관심과 분리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거시 학문과 그에 대한 관심은, 가장 미시적으로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하고, 또 그 질문과 어쩔 수 없이 연관될 수밖에는 없지 않을까? 이를테면 지구보다 1백만 배가 훨씬 넘는 부피를 지녔다는 태양에 대한 과학은 듣기만 해도 거창해 보이지만, 기실 태양에 대한 관심은 자기의 삶에 대한, 자기 주변의 꽃과 나무, 다른 동물들에 대한 관심을 지닌 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는 없지 않을까?  

 

이를테면 우리가 이라 부르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현상에 대한 누백만 년에 걸친 적응의 지속이자 흔적인 바, 해의 뜨고 짐이라는 지구의 현상이 기실 지구라 불리는 생명의 형태를 띤 우주선이 제 몸을 돌림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은 오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나날의 현상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든 안 하든, 지구를 알든 모르든, 우리 모두는 여전히 지구-태양 관계의 법칙에, 생명의 법칙에 여전히 이라는 형태로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잠과 깸의 일상적 구조화에는 지구-태양 운동이라는 원리의 문화적 내면화가 숨어 있다.

 

그 뿐인가? 우리가 늘 주린 배를 채우는 이라는 것 역시 곡물을 전제로 하는 개념인 바, 곡물이란 곡물은 모두 넓게는 진핵생물, 좁게는 식물의 일종으로 오직 태양빛의 품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태양의존적 생물이다. 이렇게 보면 밥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이는 반드시 생명이란 무엇인가, 태양과 지구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밖에는 없는 것 아닌가.

 

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를테면 숨은 생명이 곧 관계임을 일러준다는 언명은 결코 시적이거나 철학적이기만 한 언명이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과학적인 언명이기도 하다. 숨을 묻는 이 역시 반드시 폐에 들락날락하는 기체 원소를 묻게 되어 있고, 우리가 허공이라고 아무렇게나 여백인 양 생각하는 곳의 핵심적인 생명 작용 (기체 원소의 이동, 탄소의 이동)을 묻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신의 숨을 질문하는 이가 지구-생명의 운동을 질문하게 되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라 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지구의 시대의 화두들은 나의 생존, 나의 삶과 밀착되어 있고, 거꾸로 나의 실존적 삶으로부터 지구와 태양계에 대한 탐구가 출현하는 것이 온당하리라.  

 

생명체로서도 건강히 살아가고 문명인으로서도 당당히 살아가고 싶은 욕구는 인간 본연의 욕구, 만인의 소망이다. 박정희 시대에, 그리고 최근까지 이 욕구와 소망을 충족/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지구나 태양을 알 필요까지는 없었다. 기껏해야 서유럽을, 미국을, 또는 소련을, 세계 경제를, 역사를 알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완연히 다른 시대에 진입해 있다. 지구의 시대에 진입해 있다. (적어도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시대로 진입해가고 있다.) 생명체로서도 살고, 문명인으로서도 살고 싶다는 본연의, 보편의,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이전에 질문해보지 않았던 것을 질문해봐야 하고 또 그 답을 얻으려는 공부를 해봐야 한다.

 

요청되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은 그러나 우주란 무엇인가’ ‘태양이란 무엇인가’, ‘지구란 무엇인가가 아니다. 가장 기초적인 질문, 다급한 질문은 나의 생존이 지금 대체 어떤 생물-물리적 시스템으로 가능한가?’이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존[생명]할 수 있는가?’이다.

 

폭탄의 뇌관과도 같은 이 중대한 질문과 저 주노가 안고 있는 과제는 그리 먼 곳에 떨어져 있지 않다.

 

2011.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