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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종교

by 유동나무 2010. 2. 25.


아마도 종교가 필요한 순간이겠다. 한데 우리 사회의 종교들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현존하는 종교 제도들로 인해 사람들은 종교적이지 않게 되었다. 한데 주체의 위기는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만든다. 종교적이지만 종교적일 수 없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안 종교를 찾는다. 나는 2009, 아니 그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시민 사회가 선택한 대안 종교는 광장이었다고 이해한다.” – 김진호, [‘불타는 몸들의 강요된 침묵, 그것은 나의 욕망인가] 중에서

 

사람들은 종교적이지만 종교적일 수 없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렇게 된다. 사람들은 종교적이지 않지만, 종교적이고 싶다. 살을 덧붙이면 이러하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사실상> 종교와는 무관하게 살아왔고, 종교 없이 살아왔지만, 이제는 어떤 혼돈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종교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역설적 정황에서 사람들은 <대안 종교>를 찾게 된다고 김진호는 말한다.

 

그러나 그 대안 종교가 한국에서 <광장>인가? 그것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일시적 시공간으로서의 시민 종교의 광장일 수는 있었겠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대안 종교는 이미 그 기력을 다한 지 오래다. 그것은 실인즉 대안 종교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생성되고 용출된 집단 종교심이었다. 그것은 모르긴 모르되, 엄숙했으나 아마도 어떤 깊은 체념적 태도가 그 안에 깊이 슴배어든 일시적 집단 의식이었을 터이다. 

 

실상인즉 그와는 전통이 다르고 오래된 대안 종교는 따로 있어왔다. 사람의 근본심(하늘 마음)[교회에는 나가고 부처님 오신 날 절에는 가지마는] 실은 종교 없이 살고 싶다는 세속심 간의 긴장과 충돌을 잘 봉합하여 조화롭게 해온 그 대안 종교는, 종교의 필요가 지금처럼 다급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늘 있어왔다. 황대권은 오늘날 사람들의 실제 종교가 <덧셈교>라 풍자했지만, 이 사람 견해로는 오래된 그 대안 종교, 그 실 종교는 다름 아닌 <내가족사랑교> 혹은 <우리끼리사랑교>. 사랑이라 하지만 이 사랑은 자기애와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자기애만 말하면 이기적이란 소리를 들으니 이러한 수식어로 자기애를 슬쩍 감추는, 자기애 중심적인 사랑이다. 사랑은 본디 자기 없는 것인데, 이 사랑은 이상하게도 그 구심력이 다름 아닌 자기다. 그러니 순 가짜 사랑이다.

 

1860년 새 얼생명을 얻은 수운 최제우가 나자렛 예수의 뒤를 이어 분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종교다. 2008년 촛불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 중 다수는 바로 이 종교의 신도였고, 그들은 지금도 신도일 것이다. 이 종교는 그런데 그들이 얼마간은 반대했고 반대할 이들, 이를테면 이건희도 이명박 같은 이들도 믿는다. 본디 깊은 종교심이란 이런 사이비 종교심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정신적 힘이다. 예수의 고민은, 최제우의 고민은 오늘날의 우리의 것이다. 너를 버리고, 네 가족을 버리라는 말은, 하여 너남없는 세계에 살라는 말은 사람이 죽기보다도 따르기 싫어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충분히 성장개화한 철학과 과학은 사람들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은밀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한 철학은 본디 <오심즉여심>이라는, 본디 <오즉여>라는 근본가르침을 준다. 단독자는 존재론적으로 말해볼 때 가능한 개념이, 실재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인체과학 생명과학 역시 개체가 상호간에 만물이 상호간에 이어져 있음을, 그 무궁회통의 진리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하니 오늘날 <내가족사랑교>에 빠진 이들은 어떤 의미로 보면, 현대의 철학과 과학을 멀리하고자 하는 반-지성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모르는 게 낙樂>인 것이다. 그들은 언제 알고자 하는가? 어떤 것이 내 밥상 내 몸을 내 가족을 위협할 때, 그럴 때에만 그들은 알고자 할 뿐이다. [미국에서] 2001년 가을에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2008년 봄여름에 그러했던 것처럼, [또 여러 곳에서] 2008년 늦가을에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