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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의 쉬움, 산문쓰기의 어려움

by 유동나무 2010. 1. 25.


시는 쓰기 어렵다고들 한다. 내 생각에 시를 쓰기 어려운 것은 쓰려는 이의 마음이 혼탁하기 때문이다. 그 언어가 혼미하기 때문이다. 시란 실상인즉, 이러한 혼탁과 혼미를 걷어내는 훈련만 한다면,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걸출하고 빼어난 시, 후대에 길이 남을 그런 시를 쓰기란 아홉 마리의 소에서 붉은 색 털오라기 하나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터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런 시를 써야 하나. 시를 쓰려는 마음에 여록의 붓을 들었으면, 그런 수준 정도의 시는 써내야만 하는가. 그 정도를 성취할 자신이 아니면 시쓰기는 포기해야 하는가. 사실 그런 종류의 야심과 시쓰기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가 조촐한 마음의 지복으로 복귀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조촐한 자리에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를 척척 지어내, 우리의 답답한 심사를, 흔쾌한 심사를 풀어내고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시쓰기에는 물론 약간의 기예가 필요하다. 환유라든가, 은유라든가, 음보율의 조정이라든가, 음율의 확보라든가 하는 시적 감각과 기술이, 그에 대한 연마가 필요하다. 이것은 옳은 말이다. 그렇기는 하나 이보다는 시쓰는 마음태도, 마음가짐을 수련하는 것이 좋은 시를 써내는 더욱 근원적인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고자 하는 말을 곧바로, 무無의 시각으로, 비非-언어, 비非-인간의 시각으로 뱉어낸다면, 그것이 시가 될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지금 무無, 비非-언어, 비非-인간이라는 어려운 말을 썼지만,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어떤 직절의 언어로써 포착해보려고 노력해본다면, 그 글은 시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음을 절실히 표현하는 방법만 익힌다면, 누구라도 쓰기 쉬운 것이 시다. “변화하던 옛일은 티끌 따라 흩어지고, 흐르는 물은 무정한데 풀은 저절로 봄이로구나” 라거나 “운치 띤 봄바람 속의 대나무요, 밤에 향불 피고 글을 읽도다” 하고 읊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우리는 안중근처럼 “아아,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시대를 지으리로다” 하고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절박함에 이르러 일획휘지로 시를 지어낼 수도 있다. 모든 예술적 기예와 마찬가지로, 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누구나 그 맛을 스스로 펼쳐보일 수 있다. 더군다나, 언어적 능력이 없는 이가 세상에 적고, 진실된 마음을 갖지 않은 이가 세상에 적은 터수에, 시쓰기의 영역이 무슨 대단한 성역으로 여겨지는 것은 실로 온당치 않은 일이다. 잔약해진 마음, 무無에, 허공虛空에 가까워진 마음이 하소할 곳이 없어 공중에 하소해보는 것, 말하자면 시란 이런 것이어서, 대중의 것, 민초의 것이지, 천재의 것이 아니다.   


흔히 쓰기 쉽다고 여겨지나, 정작 쓰기 어려운 것은 산문이다. 아니 산문은 대체적으로 보면, 그리고 얼핏 보면, 시에 비해서 쓰기 쉬어 보인다. 그러니까 나는 말을 바꾸어서, 산문을 쓰기 어렵다가 아니라 좋은 산문을 쓰기 어렵다고 말해야겠다. 시의 경우, 그 형식과 격조만 갖춘다면 곧바로 시로 등극하여 독자제중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사로잡을 수 있지만, 산문의 경우는 도대체가 이렇게 하기가 영 만만치가 않다. 그것은 우선은 산문쓰기의 능력이라는 것이 시쓰기의 그것과는 달리 특별한 것이 아니며 같은 의미로 산문쓰기에는 어떤 기예라는 할 것이 요청되지 않는다고 널리 인정되는 탓이다.


또 하나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은 산문의 영역이 논구, 설득, 이해, 판별, 전달, 설명, 연역, 논리가 구현되는 보편적 이성의 구체화 영역인 관계로, 소쉬르가 랑그라고 부른 것의 법칙에 철저히 종속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를 거꾸로 말해도 좋다. 랑그의 법칙에 종속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산문은 필연적으로 보편 이성의 실현 영역으로 이해된다. 어쨌거나 산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보편성의 획득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논설이든, 과학논문이든,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 이해나 해석이 가능하지 않는 작품이라면, 이는 시적 진실의 영역에서 다루어야하는 것이지, 산문적 진실의 영역에서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이라 해도 흔히 시에서 발견되는 모호성의 극단적 실현만큼은 배제한다. 사람들이 흔히 산문에 비해 시를 어렵다고 여기는 것도 바로 시에서 발견되는 모호성의 극단성 때문이다. 시가 실현되는 영역은 이해가능성의 영역이 아니라 이해와 느낌이 혼합되어 있는 영역이다. 설사 이해가능성의 영역에 뿌리를 내린 시조차 어떤 부분에선 이 영역을 쉽게 탈출하고 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소설이라도, 이러한 이해불가능성의 영역으로의 궤도일탈을 그 자체 형식 안에 허용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보편적인 이해전달이 글의 우선적인 목표로 여겨지는 산문을 택할 경우, 저술가 혹은 작가가 “새로움”이라는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새로움의 발견으로 도파민을 뇌에서 배출하려고 은연 노력하는 독자제중의 마음을 산문으로써 사로잡기란 걸어서 메카에 당도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인 것이다. 이것은 주지하다시피 무엇보다도 “산문적 질서”가 “일상의 질서”인 탓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가 “산문적 말”에 식상할 대로 식상해 있고, 소쉬르가 랑그라고 부른 것의 억압성과 허위성에 이미 넌더리를 내고 있는 탓이다. 이렇게 해서 소설이나 다른 미학적 산문을 쓰는 작가들은 시적 진실이나 시적 표현의 기제를 자신의 글 안에 빌려온다. 이러한 차용은 그러나 범용한 생각과는 달리, 소설이나 예술 산문을 쓰는 작가들의 경우에만 한정되어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저술이나, 전기, 여행기, 심지어 과학적 산문을 쓰는 저술가들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차용 현상은 쉽게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모든 언어의 실천에 은유나 환유의 문학의 원리가 침윤되어 있는 탓일 것이고, 이를 다르게, 산문 저술가가 무의식적으로 이 침윤의 원리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시적 기법은 숱한 저술에서 차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슬그머니 차용되고는 이내 잊혀진다. 그만큼 산문은 특별한 인식의 충격을 제공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읽혀지는” 경향성이 있는 탓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지난 18세기 19세기 조선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산문 저술가들 내부에 축적되어 있는 문학적 기예 역량과 교양의 총량이 그들 저술의 미적 때깔과 깊이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사실이 산문 저술가들 스스로에게 인정되어야 한다. 레이첼 카슨이 일찍이 <침묵의 봄>에서 증명했듯, 시적 언어의 사용은 과학적 논구에서조차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다. 


산문 작가에게, 시적 언어나 기법을 차용하는 것 말고 “새로움”을 확보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랑그적 체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로 어떤 모종의 충격을 생산하는 것이다. 시적 언어나 기법을 사용하지 않는 식으로의 충격 가하기 기법은 크게 세 가지 꼴을 취하는데, 허상이나 추측을 뒤엎는 과학적인 데이터의 제시, 밝혀지지 않거나 모호한 채로 남아있던 사태나 사실에 대한 이전의 것과는 판이한 관점에서의 접근과 해석, 잘 알려진 적 없는 문체의 제시가 그것이다.


첫 번째의 기법은 주지하다시피 월러스틴이 그의 저서 <지식의 불확실성>에서 넓은 의미의 “역사적 사회과학”이라고 개념화하자고 제시한 영역, 그리고 전통적인 과학적 글쓰기에서 발견된다. 가령 미술책에서 축소판으로 박혀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사진을 본 학생에게, 이 조각상의 높이의 실제 높이를 제시했을 때, 한국전쟁에 대해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1990년대 산 학생에게 이 전쟁이 가져온 사상자의 수가 300-400만명에 이른다는 사실 사항을 제시했을 때, 이 데이터의 제시 자체는 어떤 충격효과를 가져올 터이다. 실인즉, 모든 과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해방하는 힘을 여기에서 얻고 있다.


두 번째의 기법, 즉 독자적이고 새로운 지점에서의 사태 파악의 제시라는 기법은 넓은 의미의 인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글쓰기에서 발견된다. 사태의 진실이나 사물의 진리를 간파해내고 통찰해내는 이성적 사유의 힘에 의해 흔히 상식이라고 생각되어진, 통례적 허상은 깨어지고 바수어진다. 독자가 어떤 시원한 정신의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은 물론 이 깨어짐의 충격 속에서다. 첨언하자면, 앞서 얘기했던 “역사적 사회과학”의 글쓰기에서 첫 번째의 기법과 두 번째의 기법이 혼융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지하는 바다.


마지막 기법은 이른바 문학적인, 혹은 문예적인 산문이라 불리는 글쓰기에서 발견된다. 과거의 문체를 복원해 쓴다거나 혹은 저자만의 독자적인 풍격의 문체를 개발해 쓰는 경우, 이러한 문학적인 산문은, 그 형식 자체만으로도 독자제현들의 시선을 휘그러잡을 수 있다. 물론 어떤 모종의 거부감 속에서. 이 거부감이 시대를 흘러 무디어졌을 때, 이러한 새로운 풍격의 문체를 이룬 작품은 그 가치가 비로소 인정되는 경향이 있다. 굳이 실례를 들자면, 김연수가 단편소설 에서 시도한 것 (소설집 (창비) 참조)은 일정 시대 지식인의 문체 복원이며, 박상륭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시도한 것은, 방언과 음보율의 활용을 통한 독자적인 박상륭 문체의 제시다. 하기사, 이러한 독특한 격을 갖춘 문체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라도, 문예적인 산문의 경우, 언어 그 자체를 “전경화”하고 있는 탓에, 시적 언어와 기술을 빌려오는 탓에, 또 이것은 “문학입니다” 라는 전제하에 읽혀지는 탓에, 독자에게 “새로움”이라는 감각을 제시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소설을 포함한 문예적인 산문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상상적인 상황구성능력에 호소하는 탓에, 사실과 논리에 바탕한 이해능력에 호소하는 다른 산문적 글쓰기과는 다른 종류의 기술, 즉 서사구성능력을 요구한다.    


철학의 선택은 앞서 말했듯, 두 번째의 길이다. 역사나 과학과는 달리, 철학은 그 본질 상,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상대적으로 쉽다. 왜냐하면 철학함의 본래적 목표란 “사물의 보이지 않는 뒷면 보기”이기 때문이다. 사물?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사물, 사태, 사건, 사람, 심리를 모두 포괄한, 일종의 “존재자의 총합체”로 여기서는 이해해보자. 철학하는 이들은 가령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이제 철학자의 새로운 목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라고 마르크스처럼 말하기도 하고, “인간 주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라고 롤랑 바르뜨처럼 말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눈과 귀를 신선함의 세계로 활짝 열어놓으며 우리의 정신을 기쁘게 한다. 역사나 과학이 보편적인 사실 사항이나 객관적인 데이터에 의존하는 반면, 철학은 “가능한” 보편적인 사유에 의존하기 때문에, 역사나 과학보다 훨씬 말 그 자체의 힘에 의존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리하여 말 그 자체가 환기해내는 어떤 힘, 말이 발산하는 충격의 힘의 측면에서, 철학은 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시도 철학도,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말 그 자체의 의해, 무명無明에 있는 우리를 명明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그 둘이 각기 사용하고 의지하는 말의 세계는 다르다. 시가 밝혀놓는 것은 우리의 가닿을 수 없는 마음의 세계이지만, 철학이 밝혀놓는 것은 해석할 수 있고 반박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다. 시로 우리의 마음은 청신해지고, 철학으로 우리의 정신은 상쾌해진다. 시도 철학도 창문을 열어놓음으로써 우리의 마음, 생각, 정신을 답답하니 갇힌 곳에서 청명한 바람이 불고 있는 곳으로 시원하게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의 독립적인 영역이 결합되는 곳은 철학의 공간이 아니라 시의 공간이다. 철학은 “가능한” 보편적인 진리만을 용허하는 탓에, 주관적이거나 환상적이거나 모호한 아이디어, 느낌, 지식, 생각 따위는 철저히 배제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시는 이러한 것들을 보편적 사유와도 결합시켜 사람들의 산문적 세계 이해에 충격을 가하고, 이 세계 이해를 확장시켜 놓으며, 독자를, 언어와 세계 파악의 두 측면 모두에서, 이제껏 발견되지 않은 신대륙으로 끌고 간다.

 

어쨌거나, 그것이 일종의 과학적인 글쓰기든, 역사적인 글쓰기든, 철학적이나 문예적인 글쓰기든, 산문은 위에서 살펴본 기법들을 통하지 않고서 일정한 글 읽기의 매력을 확보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글들은 대체적으로 말해, 언어 자체를 전경화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신선함을 생산해낼 수 있는 시 장르에 비해 독자를 글의 매혹 속으로 단번에 이끌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하기사, 앞서 지적한 대로, 소설이나 다른 산문문학 작가의 경우에도 언어를 전경화함으로써, 시인이 할 수 있는 만큼은 아니지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다. 그런데, 이들 산문문학의 언어 전경화가 강렬하게 표출될 경우, 우리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아, 이것은 참으로 시적이다” 혹은 “이것은 하나의 시다”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 문학 장르가 언어의 전경화에 성공하고 있는 경우에,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시에 가까워지고 있거나 아니면 시적 원리를 내부에서 성공적으로 원용하고 있다고, 우리는 말해도 좋으리라. 하나의 언어가 거죽을 벗고 그 내면속살을 차가운 외부 세계에 드러낼 때, 이 차가운 세계에 처음으로 드러난 언어는 파르르 떨며 우리 앞에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던, 이제 깨어난 이 언어를 다시 보고 되새김하고, 생각하면서 보게 된다. 우리 존재를 구태로부터 미지로 해방시키는 언어를. 우리가 시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다.

2007.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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