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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사회학 강독 수업* - 너절함에 대하여

by 유동나무 2010. 6. 1.


(*
여기에서 사회학 강독 수업이라 함은 사회학 이론서인 서양 원서를 원문 그대로 강의 시간에 함께 읽는 수업을 일컫는다. )

 

그때 강단 위의 그는 가지 점에서 다른 이들(강단에 서는 이들) 다른 독특한 색깔이 있었다. 하나는 그의 기품 있고 멋드러진 외양 혹은 모색이다. 그는 준수한 옷차림이 아니면 강단에 서질 않았던 것이다. 하나는 그의 공격적인 어투이다.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 폭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중의 전사처럼, 그의 혀는 언제든 우리들을 공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장전된 혀의 상태로 강의실에 들어왔다고나 할까. 그러나 -말의 공격성은 늘상 부드러운 어체에 담겨 있었다. 말의 실질은 모욕이었지만, 껍질은 경어체였던 것이다.

 

폭격의 대상, 모욕의 대상은 다름 아닌 너절한학생들이었다. 그러나 모욕의 대상은 단지 특정한 학생들이었다고 말해도 좋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모욕의 대상이 되었던 학생들은 그가 보기에 어떤 너절함 드러냈기 때문에 모욕된 것이지, 학생들 자체로서 모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평상시 모욕의 대상으로 삼고 싶었던 너절함 일반 특정 학생들에게 투사하여, 너절함 일반을 [ 학생들에 대한 모욕을 통하여] 모욕하고 있었던 것이지, 개인으로서의 학생들 자체를 모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리라.    

 

너절한 사람들, 너절한 행태들, 너절한 외모, 너절한 , 너절한 말씨, 너절한 표정. . . 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너절한 것은 다름 아닌 너절한 정신이었고, 그것의 적나라한 표현은 바로 너절한 지성이었다. 학생들의 형편 없는 영어 실력은 바로 너절한 지성을 표현하고 있었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의 혈압은 급상승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거짓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너절한 지성에 격분했던 것이다.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그는 그렇게 너절한 증오했던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그의 차려 입은 그의 말끔한 옷차림이 말해주고 있는 듯싶었다.  

 

우리들 벌벌 떨었다. 지적당한 이는 읽어야 하는 부분을 영어로 읽고 한글로 풀어야 했다. 지적당한다는 것은 언제든 모욕될 있다는 (혀의 칼에 베일 있다는 )이었기에 우리들은 벌벌 떨었다. 전쟁에서의 폭격은 사람의 육신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의 공격은 우리들의 인격체로서의 존재 자체와 밀접히 붙어 있는 우리의 정신, 우리의 지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기에, 우리들은 벌벌 떨지 않을 없었던 것이다. 그의 모욕은 그러니까 공공 모욕이었고, 공공 재판이었다. 그가 모욕하고 재판할 , 모욕과 재판을 가치 있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배심원들은 모욕당하는 학생을 제외한 우리들 모두였다. 바로 그러한 사태가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집어넣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모욕당한다는 것보다도, 동등한 입장에 있는 다른 동년배들이 배심원이 되어, 자신의 지성이 모욕당해도 좋다고 인정하고 마는 사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지금도 소심하지만, 그때는 더욱 소심했던 사람 역시 고개를 수그리고 벌벌 떨었다. 제발 나는 지적하지 말아. 나는 지적하지 말아. 쥐새끼들처럼 고개를 수그린 이들 앞에 멋드러진 옷을 차려 입고 먹잇감을 고르는 고양이 마리 믿기 힘들겠지만, 이러한 잔혹 동화의 풍경은 당시 쥐새끼들에겐 무시무시한 현실이었다. 

 

이렇게 말해보면, 독자들은, 박영신이라는 사람, 나쁜 사람이네, 하겠지만, 글은 그에 대한 찬사의 글이지, 반대가 아니다. 비록 종로에서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식이라는 저열한 방식을 통해서이긴 했지만, 그의 강의 아닌 강의는 적어도 가지 은혜는 수강자들에게 베풀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하나는 다소 모호한 것으로 어떤 자극이다. (사실 강의실에서 강사가 수강자들에게 베풀어 있는 최고의 것은 기껏해야  자극정도가 아닐까. 공부는 대개는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 영어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네가 공부하겠다는 학문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산중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르쳐주려 , 그는 그러한 철벽을 우리들 앞에 제시해주었다. 이것은 하나의 학문을 대강 설명하고 대강 이해하고 넘어가려는 태도의 정극편에 있는 태도다. 그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그는 분명 우리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질 있도록 모종의 자극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호한 자극이었다고 말할 있는 것은, 자극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열심히 학문에 나선 이는 쥐새끼들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다수에게는 박영신은 지금쯤은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에, 청년이었던 자신을 한껏 모욕했던 이로 기억되고 있을 터이다.   

 

하나의 혜시는 보다 분명한 것으로, 앞서 말한 너절함 관계된다. 적어도 그는 너절하다 중요한 형용어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너절함이란 무엇인가? 어떤 경우, 단어에 대한 설명은 오로지 반대 개념어의 제시로서만 가능한데, 경우도 그러하리라.  사전은 1] 허름하고 지저분하다 2] 변변하지 못하다 3] 품격이 낮다로 단어를 기술한다. 아니나다를까, 2] 3]에서 우리가 보는 역시 반대 개념어의 제시인 것이다. 그가 너절한 학생을 향해 김군, 그렇게 너절해도 됩니까? 그렇게 너절하게 살아도 됩니까?’ 라고 말했을 , 그가 말로서 은연 강조했던 것은 다름 아닌 -너절함이었던 것이다. 제군들, 그대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너절함’ ‘너절하지 않음 가슴에 품고 몸에 담아야 한다. 말끔하고, 변변하며, 고상한 품격을, 고상한 지성, 고상한 인격을 가슴에 품고 몸에 담아야 한다. 이러한 말을 그는 줄곧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은 , <세계는 너절함으로 가득하다, 너절함을 가르치는 세상이다. 하니 너희들만은 너절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너절하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제군들, 너절하지 마라. 제발 너희들만은 너절하지 마라> 말에 다름 아니었다. ‘너절한학생들에 대한 그의 증오는, 모르긴 모르되, ‘너절한한국인들, ‘너절한한국의 도시와 거리들, ‘너절한한국 사회 (혹은 북한을 포함하여 너절한 조선, 너절한 한반도), 숱한 너절함으로 점철된 너절한 현대 한국사(조선사) 대한 그의 증오였던 것이다.

 

마틴 부버와 에른스트 블로흐의 한가지 공통점. 늙어 강단에 학자들이라는 점이다. 남들 강단에서 은퇴하고 죽어갈 처음으로 강단에 서는 이들이다. 늙마에라도 강단에 일이 사람에게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괴상한 일이 인생에 발생된다면, 사람은 박영신 선생의 뒤를 이어 너절하다 형용어를 한국의 청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사람 눈에는, 그때 사회학 강독 시간에 강조되던 너절한 세계 아직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양자역학은 알면서 요리할 줄을 모르는 것은 너절함이 아닌가? 현대의 최첨단 문학과 철학과 과학을 논하면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절함이 아닌가? 선거에 이북을 이용하는 것은, 그러한 속임수에서 속고 마는 것은 너절함이 아닌가? 이상은 좋지만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 하는 고리타분하고 근거 없는 현실론은 너절함이 아닌가? 자연경물을 오직 투기와 개발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은 너절함이 아닌가? , 너절하고 너절하도다.)

 

그러나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위대한 형용어를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모욕을 위한 방편이 없다. 차라리 그것은 (사회학 강독 시간의 박영신 선생이 그러했듯) 일종의 자기-표현self demonstration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에 대하여 자신 있는 사람만이 있는 형용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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