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전 산문

덧글 대신에 쓰는 글

by 유동나무 2010. 2. 15.

글이란 글쓰는 주체가 쓰고자 하여 쓰는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쓴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글이라 부를 수 없으리라외려 글쓰기는 글쓰는 이가 어떤 미디엄이 되는 과정과 더불어 발생한다 달리 말하면그것은 글쓰는 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발생 과정에서 글쓰는 이는, 글쓰기의 주체라기보다는 어떤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어떤 무엇이 그이-매개체를 자극하여, 그이는 절로 쓰게 되는 것이다.



이놈의 인터넷 글살이를 아예 끊지를 못하는 것은 때로 그러한 글쓰기의 자극을 간혹 이곳에서 받기 때문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말인즉 가끔 이곳에서 글은 절로 쓰여지는 것이고, 글쓰기의 미디엄이 되는 과정은 어떤 쾌를 동반하기도 하는 바그 쾌미를 못버려 이런 글살이를 못버리고 있는 것이다허나 그러한 일은 가끔 일어난다.    


이 글은 덧글[댓글]에 관한 것이다덧글을 또 달까, 하다가, 에이, 덧글 따위 달아서 뭐하누, 하는 생의가 났는데 그 바람에 덧글에 대한, 덧글을 통해 짐작해보게 되는 사람의 격에 대한 생각을 짧게 해보게 되었다덧글 경험이 이 글을 치게 한다.




고백으로부터 글을 풀어가보자
이 사람은 언제부턴가는 덧글이라는 것을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포스팅도 [시간 아까워서] 못하는 형국에 덧글을 말해 무엇하리. 그렇기는 하나, 간혹 덧글을 달 때도 있는데 그러할 때 이 사람은 그 덧글이 붙은 원문 쓴 이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커다란 애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그 덧글 읽으시는 분들은 알아주셔야겠다거꾸로 말해간혹 이 사람이 남기는 덧글은이 사람의 몸에 타오른 어떤 애정의 불꽃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애정 불꽃의 일점이다.  아, 이건 아깝다, 이건 좀 다듬으면 어떻까하는 마음이 이 몸으로 하여금 덧글을 달게 한다.




그런데
 그 애정의 일점이 "꺅 정말 멋지셔"의 꼴을 한 적은 없다이런 덧글은 이 사람은 달 줄을 모른다그러한 감언은 그 감언을 듣는 이를 성숙케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 사람에게 애정이라는 말은 타인이 <좋은 상태>에 있도록 하는 데 보탬이 되는 행동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고, 이 <좋은 상태>가 또 <성숙>이라는 것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수이 말하여, 간언보다는 직언이 감언보다는 고언이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이고, 이왕지사 말이라는 것을 할 거면 그러한 종류의 말을 하고 싶다는 게 이 사람 생각이고 뜻이다. 그래야 이 애정이 조곰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는가 하는 게 이 사람 생각이고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언, 고언 류의 <애정 덧글>의 실체는 곧잘 오해된다. 우선 길이 탓이다. 그것이 너무 짧고 간단하여 오해되기 쉽다 원문을 쓴 이가 듣기에 과히 편치 않은 점을 지적하는 것이 이 몸이 쓰는 덧글의 요체이기에 그러하겠다이 사람과 비슷한 부류가 세계에는 적은 탓인지, 덧글을 듣는 이들은 대개는 이 사람이 그들 자신을 냉냉히 비판하는 줄로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그러할 때 역시 <사람에게는 애정을 버려야 하나>, 이러한 오래된 생각을 곱씹어도 보지만, 그것보다는, 그러한 생각을 그 사람으로부터 자아내었을, 그 사람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또 자만심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  


자존심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그러나 늘 하는 말이지만 자만심은 참으로 나쁜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만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데내 잘 낫다, 내는 허물 없다, 내 의견이 옳다는 생각의 노예가 된 나머지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스스로 눈을 닫고 마는, 그 가능성을 스스로에게서 은폐하는 정신의 이름이 바로 만이다.  보통 사람의 만 질병지수를 만일 5 라 본다면 (최다를 10, 최소를 0으로 하고, 0을 만이 없는 건강한 상태라 해볼 때) 자기를 글쟁이나 지식인 혹은 식자로 생각하는 이들의 그 평균 지수는 족히 8-9 는 되리라는 것이 이 사람의 생각이다. 그 만큼 많은 먹물쟁이들이 이 질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하나 생각해볼 만한 점은 만의 지수가 높은 이일수록
 참된 의미에서의 지식인과는 거리가 먼 종족일 공산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참된 의미에서의 지식인? 이 말로 이 사람이 하고자 하는 말은 상류의 지식인이다. 상류의 지식인? 만을 지닌 이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로 말글살이를 하는 지식인을 이 사람은 [다를 말을 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부르고자 한다달리 말하여 상류의 지식인은 '내 말이 옳다'고 말하는 데 익숙하거나 능숙치 않고, 거꾸로 '내 말이 그를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거나 능숙한 사람을 가리킨다
.  


그러한 일에 능숙하다는 것은 곧 사물이나 사태의 여러 면을 동시에 두루 넓고 깊게 보려는 태도에 익숙하고 그렇게 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을 말한다만일 문제가 되는 것이 어떤 이의 발언이라면, 그러한 태도의 임자는그 발언에서 발언자가 보이는 태도, 어조, 그 발언의 컨텍스트, 그 발언에 사용된 특정 어휘의 뉘앙스를 두루 고려해가며 그 발언으로 그 발언자가 하고자 하는 말, 그 발언이 맞고 틀릴 혹은 적절하고 적절하지 않을 가능성을 두루 고려해볼 터이다그러한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판단의 보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즉 <가능성의 열림> 속에서 즉각적인 판단은 일체 보류되는 것이다. 그 판단 보류의 외화는 바로 침묵이며, 침묵 속에서의 성찰이다성찰은 시간을 요한다.




침묵 속에서 성찰해본다는
 것은 곧 <쉽게 답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질문해>본다는 것을 말한다하여 생각하는 일에 능숙한 이, 지적 능력 배양에 힘쓰는 이의 정신 세계에서는 질문하는 능력이나 태도가 대답하는 능력이나 태도보다 늘 중시된다 사실 누군가도 말한 바 있지만, 최고의 지적 능력이란 최고의 질문을 할 줄 아는 능력에 다름 아니며, 학자의 삶이란 질문하는 이의 삶인 것이다바로 또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것을 눈치 챈 이에게 만은 절대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만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그이에겐, 섣부른 판단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 자신 높은 학문의 세계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에 다름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매듭 짓자. 무슨 말인가. 만은 쉽게 빠질 수 있는 어디에나 널려 있는 구렁텅이인즉 이 구렁텅이에 안빠지는 능력을 배양하자는 말이다그 능력의 유무에 상하가 갈림을 알자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덧붙여 단다 하는 덧글이란 덧없는 글인지는 모르지만, 덧 있는 글이든 덧 없는 글이든 글이라 불릴 수 있는 그것은 사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쪽인즉 (왼거울이 못되니 쪽거울 혹은 거울쪽이라 하자,)  그것은 우리 모두가 두려워해야 하는 그 무엇이니 두려운 마음으로 쓰자는 말이다. 이것은 꼭 뉘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이 사람 자신을 포함하여 그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심지어 ㅇㅍ이라는 범죄를 범한 이도 포함하여 말이다


  
* p.s 그러나 이 사람은 ㅇㅍ을 관용할 정도로 넓은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전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르네상스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  (2) 2010.04.14
대안종교  (1) 2010.02.25
시쓰기의 쉬움, 산문쓰기의 어려움  (0) 2010.01.25
흐느껴 우는 기러기 해가 뜨니 비로소 아침이네  (0) 2010.01.25
Avatar  (0) 2010.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