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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쓴다는 것에 대하여

by 유동나무 2010. 1. 6.

 

 

흔히 듣는 말 중 하나는 내가 글을 쉽게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은 그런데 과연 무엇인가. 이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내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 중 첫째는 요즘 세태와 관련된 것이다. 인터넷 세상이 열린 이후로 사람들이 소위 문자라고 하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일대 격변이 일어난 느낌이다. 인터넷이라는 정보호환 영역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신 형식은 오직 글뿐이다. 작금의 인터넷 공간에서는 다른 보조적 표현수단이 충분히 동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표현자가 게시물로서 올려놓은 몇 가지 문장들, 글의 조각을 가지고 그가 뜻하고자 하는 바, 곧 그의 정신과 정서 일체를 해석해야 하는 절박한 조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다급함에도” 인터넷에 글 - 이것이 한 단어든, 수십 페이지 분량의 글이든 - 을 올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쉽게, 너무 태만하게 글을 쓴다.

 

 


부박하고 단말마적이고 부주의한 모든 “인스턴트적” 표현들의 대대적인 호환……. 기실 이것이 인터넷 세상에 떠도는 거개 말글의 얼굴인 것이며, 이러한 표현 형식이 부박하고 단말마적인 감수성의 개발로 이어져 성찰하는 사유인의 “생산”에 해를 끼치고 만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새로운 표현, 미지의 차원, 가능의 세계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하여 말과 글이 새로운 꼴을 취한다 하여 그것 자체를 조건 없이 반대하는 무뢰 보수주의자는 아니라고 스스로 자처를 하는 몸으로서도, 이러한 전반적인 경박한 흐름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내가 인터넷에 손쉽게 머릿속에서 막 퍼 올린 글을 거의 올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허나 이것은 내가 쉽게 글을 쓰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퍽이나 궁색한 변명이다. 인터넷이 글쓰기-글읽기의 조건이나 환경으로 주어지든 말든 간에, 내가 쓰는 글쓰기의 스타일에 변모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이 좋은 글을 쓴다는 것과 크게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좋은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쉽게 쓴다는 것과는 밀접한 관련이 과연 있는 것인가? 좋은 글의 필수적인 요건은 읽기 쉬운 글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글쓰기와 글읽기의 변증법에 대해서 짧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사르트르가 일찍이 1940년대에 지적한 바대로, 사실상 모든 글쓰기는, 독자의 읽기라는 행위가 없는 한 무용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므로, 또 글쓰는 자의 언어는 그 개인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빌려 온 것이므로, 독자의 언어, 독자의 자유에 대한 “호소”일 수밖에는 없다. 독자의 언어, 읽겠다는 독자의 자유가 없다면, 글쓰기의 창조물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물로 세계에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 글쓴이의 창조물을 의미를 지닌 유의미한 실체로 생성시키는 것은 늘 독자 자신의 언어인 것이다.

 

 


그런데, 또 바흐찐이 지적한 바 그대로, 이 독자의 언어는 각기 다른 “개념적 지평”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예술품이 아닌 글로 된 예술품의 경우엔, 오로지 무수한 지평에 의해 구성된 무수한 “작품들”만이 존재하게 된다.

 

 


모든 글쓰기는 타자-의존적이며, 타자-지향적이다. 그리하여 이 타자-독자의 언어 지평 - 바흐찐이 “개념 지평”이라 부른 것 - 이 글쓴이의 저작물에 구현된 언어를 “흡수”할 수 없을 때, 그 저작물은 길가의 돌멩이나 벽돌과 같이 딱딱한 사물에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 경우에 그러하다. 하나는 읽고 쓰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어린이의 경우. 둘은 역시 읽고 쓰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외국인의 경우. 셋은 독자가 일정한 능력을 갖추긴 했으나, 그 저작물의 언어를 “구성”하거나 “흡수”하는 데 장애를 느끼는 경우.

 

 


소설가 박상륭의 작품은 이 세 번째 양상을 비교적 많이 양산해내는 경우인데, 이 경우, 이 “구성”과 “흡수”에 실패한 이들, 이것을 거부한 이들이 쏟아놓는 후일담은 “그가 난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대로, 독자들의 “언어-지평” - 언어에 대한 감수성, 독서량, 독서습관, 그가 평소에 대화하는 이들의 지적, 문화적, 언어적 수준 등등에 의존하여 구성되는 - 은 천차만별이므로, 이 “난해함”의 정도는 또 천차만별일 것이다. 따라서 “모두에게 난해한” 작품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거의 모두에게 난해한” 작품이라면, 그것은 이미 작품이 아닌, 의사-작품일 것이다. 다시 말해 가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글을 쉽게 써야 좋은 글이다”라고 주장한다거나, “좋은 글의 첫째가는 요소는 쉬운 글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그것을 주장하기에 앞서 “쉽고 어려움”의 기준이라는 것이 이처럼 읽고 쓰는 능력을 훈련 받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어서, 여기에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가 쉽게 쓴다고 쓴 글이 어떤 독자에겐 한없이 어려운 글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이가 제 딴에 아주 어렵게 쓴다고 쓴 글이 어떤 독자에게는 한없이 읽기 쉬운 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점을 고려하여,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중학생 정도의 읽고 쓰는 능력”을 그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중등교육을 받은 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어떤 막연한 테두리로서의 “쉬운” 글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중등교육을 잘 끝마친 이, 그러니까 한국의 “우수하다”고 하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그러니까 위의 주장을 펴는 이들이 “우리들의 평균”으로 제시하는 이 친구에게 김우창 선생이나 박상륭 선생의 저술을 읽게 한다면 어떨까. 그는 분명히 “난해하다”고 고백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친구가 “구성”하거나 “흡수”하지 못한 이 저술들은, 평균의 “구성능력” “흡수능력”을 넘어선 것이므로, 쉬운 글이 아니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좋은 글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내 눈에는 이들의 작품, 이들의 저술이야말로 20세기에 한국어로 교육받은 이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적 성숙, 언어적 구사 능력에 도달한 이들의 작품들인데, 이것들이 “평균”의 눈에 “난해”하다는 이유로 “좋은 글” 이하로 평가절하 되어야 한단 말인가. 만일 사태가 이렇게 된다면, 한국문학이 생산해낸 거의 모든 빼어난 시작품, 철학적 깊이를 확보한 소설들과 산문들, 일정한 사전 교양을 요구하는 모든 인문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저술들이 좋은 글쓰기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글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아가 이런 글들을 써냈던 이들이 경험한 모든 언어적, 심미적, 철학적, 지적 훈련들, 그리고 이 훈련들을 둘러싼 다양한 교육들이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결국 “중학생 수준을 갖춘 이라면 뉘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쓰기”의 입론은 두 가지 양식의 글쓰기 – 즉, 횡설수설하면서 제스처만 우아할 뿐, 실제로는 정치함과 유려함과는 관계가 전연 없는 문장들의 어설픈 조합에 불과한, 모든 “잡음으로서의 글쓰기”, “지적 과시 욕망에 사로잡힌 글쓰기”, 그리하여 “독자의 읽기에 호소하기를 그 내면 구조로서 거부하고 있는 글쓰기” (1) 와 상식인의 일상적 차원에서의 접근을 허용치 않으려는 목적에서 난해성을 고집하는 권위적 글쓰기 [법학, 의학, 과학 등 분야의 이른바 “전문서적”으로 이미 체계화된 글쓰기] (2) 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서 소용될 수는 있어도, 글쓰기 그 자체의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입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읽기 쉬운 글일지라도 “쓰레기”일 수 있는 반면에, 아무리 읽기 어려운 글이어도 “보석”일 수 있는 것이다. 읽는 이의 “언어-지평”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읽는 이의 입장에서의 “읽기 쉬움-어려움”은 그 자체로 좋은 글의 규범적 평가기준criterion 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 읽는 사람 모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글일까.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일까. 우주가 그렇게 수학공식처럼 구성되어 있을까. 어느 정도가 읽기 쉬운 글일까. 읽기 쉽다고 좋은 글은 아니겠지만, 우선은 읽기 쉬워야만 하는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는 정묘한 생각, 깊이 있는 사고, 섬려한 사유를 단순한 문장, 쉬운 문장으로 옮겨놓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유는 특정한 단어, 표현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성적 담론의 영역뿐 아니라 정서를 표현해야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정서란 보통 단순한 문장, 쉬운 문장으로는 도통 표현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이 깊이 아플 적에, “마음 아프다”라는 간명한 말로서 그 마음의 상태가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 자체가 이미 “난해”한 존재다. 그런데 어떻게 “읽기”를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한 “앎”을 구하면서 쉬운 읽기만을 바라는가. 김우창, 박상륭 같은 분들은 그들의 저술로써, 독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그들의 “앎”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글”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 글읽기 수준이 “중학생” 정도라면, 그는 “고등학생”이 되어야 하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으로, 대학생은 대학원생으로, 대학원생은 교수로, 교수는 겸손하고 청담한 지성인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2007.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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