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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죽은 이들은 되돌아온다 (1)

by 동류실 2026. 8. 23.

3/1. 광복절. 이런 날에 비해 6/6 현충일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날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개인사를 되돌아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66>이라는 날짜가 임의적으로 지정된 <비역사적인> 날짜라는 데 있다. 대체 왜 66일이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6/25 전쟁이 일어난 6월의, 아무 날이나 골라서 정했다고 한다. 1956년 이승만 정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니까 <625>로 정하면 될 것을, 625일만은 피하고 싶으니까 엉뚱하게 66일이라는 무의미한 날짜가 선택된 것이다.

<625>을 현충일로 정하는 게 맞지 않을까? 625, 그날을 기억하고 한국 전쟁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5년의 좌우대립의 성립과 그 폭발로서의 한국 전쟁이라는 귀신적 사건은, 아직도 이 나라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 전쟁으로 경험한 문명 붕괴, 치명적 상처를 마치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멀리하려는 (집단) 무의식이, 첨단의 물질적/기술적 성장이라는 미래로 최대한 빠르게 질주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정반대로 그 사건이 현재를 얼마나 강하게 옭아매고 있는지를 반증한다.

64일 대통령 취임 선서 행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멋진 말을 많이 쏟아냈지만, 그중 으뜸은 죽은 자와 산 자, 미래의 과거라는 표현이었다. 정확히는 다음과 같다.

"한강 작가가 말한 대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 이제는 우리가, 미래의 과거가 되어 내일의 후손들을 구할 차례다."

흔히 우리는 제사라는 것을 지내면서도, 장례식에 가서 절을 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도 죽음과 과거가 어떻게 현재의 삶에 얽혀드는지에 관해서는 똑바로 생각하기를, 또는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린다. 그런 특별한 행사와 현재의 삶을 분리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재, 막 도착하고 있는 미래를 매 순간, 어떻게 선택하는 것일까? 인간을 집단 폭행, 집단 살인하는 일은 우리의 현실에서는 절대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그 생각의 이행에는, 집단 살인의 희생자가 된 이들의 죽음이 관여하고 있다.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과 문화사적 동질 경험을 지닌 집단(이른바 민족)이 타 집단의 지배를 받는 치욕적 사태에서만큼은 절대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의 바탕에도 그 지배에 저항하다 죽은 이들의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완전히> 죽어 사라진 것이 아니다.

20세기 한국사는 억울한 죽음, 비통한 죽음, 기억되기를 갈망하는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20세기 한국을 살아낸 이들은, 그러한 특수한 죽음의 레일 위를 달렸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그들의 과거, 또는 과거의 그들의 죽음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재의 거름이고, 현재적 삶의 신체를 가능하게 하고 있고 그 신체의 삶에 함께하고 있는 피에 다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거름과 피. 그러나 활동하는 거름과 피. 그것이 그들의 죽음이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기란 건조한 그 죽음들에 물을 주어 그것의 생기를 되살려내는 것이자, 그럼으로써 현재를 그 죽음들이 추동하는 미래 쪽으로 강하게 열어젖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 죽음들이 안내하는 쪽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된다.

"죽은 이들은 말하고, 돌아오고, 되살아난다." (앙드레 브르통, <플라뇌르, 산책자> 중에서 재인용)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할 때만, 우리의 삶이라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말하고, 그곳으로 돌아오고 되살아날 뿐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 어떤 고인의 죽음은, 어떤 특별한 죽음은, 기억되어야만 하는 죽음은 현재를 이루는 사건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2025.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