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적 맥락에서는 예술 역시 진지한 재고 대상이다. 비대해진 기술권을 구성하는 모종의 과잉 물질 중 예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예술은 (상품, 에너지, 편의 기술물, 쓰레기, 오염물, 기술화석과 더불어) 범람하는 사물에 속한다. 기술권의 비대화가 문제라면, 그것에 기여하는 과생산된 예술도 문제일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예술과 디자인이 상품, 테크놀로지, 이산화탄소의 초과 생산(범람)을 지속하는 심미적 도구로 동원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소비자가 아닌 당대인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소비자의 심미적 감각을 자극하거나 그것에 호소하지 않는 상품·기술품이 하나라도 제작되고 있을까? 예술의 전문 영역으로 여겨지던 아름다움과 디자인은 그간 상품·기술품 제작 영역에서 맹활약해 왔다. 자본은 지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상품화라는 운동은 사물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이 운동에 휩쓸려 사물은 과잉 심미화된 인간에 의해 과잉 심미화된다(심미화되지 않은 사물, 종래 그대로 사물은 이 세상의 배경이거나 심미화 과정에 동원될 수 있는 잠재물, 즉 원재료일 뿐이다). 사물의 과잉 심미화 경향과 사물(상품, 쓰레기, 오염물 등)의 범람 경향은 한 짝이다. 나아가 오늘날 당대인이 당연시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탐욕은 맛과 기술 편의물을 누리는 쾌락(기술 쾌락)에 대한 탐욕과 동궤의 것이다.
인류세적 맥락에서 예술이 문제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술이 오직 지구상의 한 생물종에게만 가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우주적 외톨이들의 자기 실현물 성격을 띤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인간과 예술의 분리 불가능성을 시사한다. 예술은 인간의 한 변용물에 해당한다. 예술은 인간이 생산하는 여러 사물 중 하나가 아니다. 예술은 사피엔스라는 종이, 인간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특이 사물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다소 기이한 종이 지구에 출현했다는 우주적 증거물이다. 예술은 인간에게 나타난, 우주적 진화의 한 꽃이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의 종속물이 아니다. 인간이 생산해도 예술 작품은 그 자체의 생명과 힘, 행위력을 보유한다. 자코메티가 <걷는 인간>보다 위에 있는 게 아니라 <걷는 인간>이 자코메티를 비롯한 모든 인간 위에 있다. 인간이 예술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예술이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은 예술로써 자기와 세계, 우주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정신적 틀을 마련해 왔고, 그것에 의존해 살기 때문이다. 초객체라는 개념을 다시 쓰자면, 예술도 일종의 초객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산물이지만,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힘을 내장하고, 인간을 압도하며, 인간에게 압도적 힘을 행사하는 객체로서 초객체.
동시에 예술은 인간 정신과 비인간 존재의 협력을 통해 나온 사물이다. 화가가 그릴 때 그는 사물을 창조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옳다(장 폴 사르트르, 1998). 그러나 화가가 푸른 물감으로 푸른색·꼴이라는 사물을 창조할 때, 푸른 물감은 화가의 손에 의해 동원되는 수동적 객체만은 아니다. 오히려 화실에서 발생하는 것은 결합이고 협력이다. 지구적 동료의 참여 없이 화가는 선 하나도 그을 수 없다. 이젤, 화판, 오일, 물감(안료), 붓의 행위성(agency) 없이 화가 마티스는 <춤>을 그릴 수 없었다. 따라서 지구적 동료의 참여가 그 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예술 작품은 지구적 차원의 작품이다. 인간은 예술을 비인간과 함께 생산할 뿐이다. 예술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서 방향을 틀어 미술관과 박물관 창고에 쌓여 있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지구의 물질 동료들이 동원되고 착취되었는지를(이를테면 붓의 제작에 들어간 포유동물의 죽음과 희생을) 말하기 시작하면, 예술 창조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숱한 인간의 악행이 드러날 것이다. 어떤 동식물과 광물은 예술 생산 과정에서 부당하게 협력을 강요당한 존재이기도 했다. 공윤지는 예술을‘우정의 언어’라고 부른다. “예술이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사회를 이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공윤지, 2024, p.140). 그러나 예술은 창작자와 비인간이 먼저 이어져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는 물건이다. 예술이 우정의 언어가 되려면 그것은 창작자와 비인간 존재물 간 우정의 언어부터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류세의 예술>(2025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주제연구포럼 자료집, 이후의 미술(관) 수록)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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