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와 백범김구기념관의 발표 자료(2026년 백범 탄생 150주년 특별전)에 따르면, 《백범일지》의 누적 판매부수는 1천만 부가 넘는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 등 6개 언어로 번역, 약 160종의 국내외 판본 있음) 그러나 판매가 곧 독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나 많은 이가 이 책을 읽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청소년용 축약본, 편집본은 많이 읽혔을 수도 있겠지만, 정본을 꼼꼼히 읽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백범을 높게 보지 않았다. 몸을 던지는 반일 투쟁을 낮게 보는 것도 아니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 옳은 행동이 있었지만, 광복 이후에 그가 보인 전반적인 이념 성향(민족주의, 반공주의 노선)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범의 이념 자체가 의심스러웠으므로 《백범일지》(백태남, 조윤형 역주, 다할미디어)를 쟁여두기만 하고 거들떠보지 않은 것은 도리어 그러한 사정에 부합하는 행태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최근 우연히 《백범일지》를 읽고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젊은 시절의 그는 내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가 그 시절 <옛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옛날 사람이라 함은 첫째, 옛 범절과 풍속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둘째, 옛 조선말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고, 김창수, 김구, 그가 마음에 든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백범은 내가 살고 싶었던, 살고 싶은 삶을 젊은 시절, 100년도 더 전에 살아냈다. 그게 무엇일까? 그건 한마디로 도의道義를 삶의 중심에 두고, 그 과정에서 경제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게 하는 삶이다. 의리와 신망, 우의로 사는 이상적인 삶을 그는 살아냈다.
약간의 첨언이 필요하다. 백범은 동학교도, 승려, 기독교인으로 옮아가는 사람인데(이것도 무척 기이하다!), 서른이 되기 전에 기독교인이 되면서 서구화되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화서 이항로 계열인 고능선(안중근 부친 안태훈을 통해 알게 되는)에게서 배웠으나, 결국 스승의 노선과는 척을 지게 되는 인물이다. 그의 이 노선 변경, 즉 <서구화>는 그가 서양식 모자를 벗어 인사하자, 아이들이 갓을 벗어 인사하려 하는 다소 우스운 장면에 잘 드러난다. 그러니 그의 단발, 서양식 옷차림, 기독교 입교 등의 탈조선 행태를 생각하면 옛 범절과 풍속을 아는 옛날 사람이라는 말이 허언처럼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기록 속에 드러나는 사람들의 옛 풍속과 범절에 젖지 않은 채로 그가 <2세 국민 교육> 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백범일지》 상권의 앞부분에서 독자는 100년~140년 전 시대 사람들의 행태, 에토스, 정서 등은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이 옛 조선말로 드러난다는 데 읽는 이의 기쁨이 있다.
그러나 백범은 고능선의 배외주의를 배척하고 개화의 길을 간 사람이다. 개화에 젖을 대로 젖어 얼 자체가 온통 서구인의 얼이 된 우리는 이 개화의 길을 옳다, 그르다 할 자격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일망정, 우리는 또한 알고 있어야 한다. 도의와 의리를 중시하는 백범 안의 좋은 빛은 당시의 반-개화파론자들, 배외주의자들, 유학자들인 이항로-고능선으로부터 온 것임을.
도의道義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산다(도의에 경제를 종속시키며 산다)는 것도 더 설명이 필요하다. 그의 막내 삼촌은 김창수(김구)라는 인간이 농사를 짓지 않고 대체 어떻게 경제를 꾸리는지 심히 의심스러워한다. 그러다 그가 산다는 곳(그가 교사로 있는 곳)에서 그가 어떤 신망을 얻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고 듣고는, 조카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망으로 먹고 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오늘날에도 한 가지 길이 있긴 하다. 정당에 투신하고 공천을 받고 입후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범일지》에서 인상적인 것은, 안태훈의 사람 거두기, 김주경-유완무 일당의 사람-공동체 만들기로서, 지금은 멸종하다시피한 이 기이한 인간형들은 정치인 되기 노선 외의 <신망으로 사는 삶>의 노선을 보여주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김주경은 가산을 거의 탕진하다시피 하며 김창수를 옥에서 빼내려 한다. 유완무는 김창수를 본 적도 없는데도, 김창수 구출작전을 조직한다. (김창수에게 김구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이들이다.) 왜일까? 의리 있는 사람, 신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 한 사람을 얻는 데 그만한 돈과 시간은 기꺼이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완무의 전국 네트워크, 인물 검증 시스템은 놀랍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백범일지》 안에서 나는 삼전닉스 각자도생의 지옥도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해 분향 자리의 향처럼 은은하게 뻗어 나오는 복음을 듣는다. 그러나 실행할 자 누구인가? (2026.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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