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낱말의 우주

梅―꽃과 정신

by 유동나무 2011. 6. 19.

(Mei/) Mei/Mae, []

+ . 5월에 그 씨를 거두어 갈무리해 두었다가 이듬해 2월 집 앞 뒤에 수백 그루 심으면 겨울 눈 속에서 꽃이 필 뿐만 아니라 진한 꽃 향이 사람을 감싸 뼛속까지 싱그럽게 한다—[산림경제山林經濟] 편에 나오는 말이다.[1]사람의 뼛속까지 싱그럽게 한다는 표현이 시선을 붙든다. 북반구 겨울의 그 차고 청쾌한 공기에 천연스레 어우러지는 이것의 독특한 청향淸香, 호젓하니 단아하면서도 속기俗氣 일점 없는 이것의 특유의 자태이를 가만 관상해보는 맑은 멋과 운치를 옛 한국인들은 (적어도 이조 시대의 일부 지식인 집단은) 퍽 즐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나무는 본래 한반도에서 자생했던 나무가 아니다. 이것이 한반도에 수입된 지는 채 1500년이 되지 않는데, 그 원산지는 중국의 허베이 성과 쓰촨 성이라고 한다.[2] 즉 이 나무와의 교분의 역사는 한국인보다는 중국인 쪽이 훨씬 더 긴 것이다.  

 

 

원산지가 중국이니 이를 지칭하는 말 또한 중국에서 온 것임이 틀림없다. 그 말은 물론 주지하다시피 라는 것인데,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그 번역어로) Japanese Apricot이라 나오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3] 허나 통탄은 잠시 접어 두고, 의 문자 구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눈에 선하게 잡히는 것처럼 이것은 (나무 목)(늘 매)를 합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자는 (아무 모)라고 한다. 또 그 고형을 보면 열매 같은 것이 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니 이것은 본디 나무 위에 붙어 있는 맛 나는 무엇[=열매]’을 강조했던 문자임이 거의 틀림 없어 보인다. 오늘날의 형태인 는 이 열매 모양 문자의 변형태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라는 낱말의 핵심은 (아마도) 본래는 그 열매에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는 아하, 그렇구나~’ 하고 쉽게 지나가고 말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열매의 힘이란 정말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힘은 란 무엇보다 열매지라고 말하도록 우리들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매실梅實[매자梅子]의 힘이란 대관절 무엇이길래? 우선 이 녀석의 약재로서의 힘이 정말로 대단하다. 특기할 만한 매실의 (약재로서의) 특성은 구연산이라는 유기산의 함량이 다른 과실에 비해 유독 높다는 것, 그리고 카테킨 산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구연산은 인체를 쉽게 피곤하게 만드는 산독화 물질을 체내 밖으로 방출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카테킨 산은 장내에 해로운 균을 살상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포나 혈관을 젊고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게 하는 데, 장을 젊고 건강한 상태로 유지/복원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4]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이것은 간과 담을 다스린다. 세포를 튼튼하게 하며 혈액을 정상으로 만든다. 내장의 열을 다스리고 갈증을 조절한다. 토사곽란을 멈추게 하고 냉을 없애며 설사를 멈추게 한다. 입 안 냄새를 없애며 가슴앓이와 복통을 다스리고, 허증 피로를 다스리며 폐와 장을 수렴한다.”[5] 요컨대, 매실은 정혈/강장/피로 회복[간의 능력 보충]/노화 방지/항균과 살균/구충/해열/갈증 방지/내장 질병 해소에 두루 효험이 있는, 참으로 그 은덕이 방대한 과실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오늘날에도 과일/////농축액//아찌pickle(우메보시) 등 다양한 양식style으로 널리 식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다 해서 만일 우리가 그 열매에만 관심을 둔다면, 를 대접하는 제대로 된 법례는 아니겠다. 의 정수는, 사람의 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당 매실이겠지만, 사람의 정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당 매화라 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 열매의 효용을 본 몸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그 꽃의 미덕美德[6]을 기린 이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말이다.

 

 

꽃의 미덕을 옛 사람들은 어떻게 기렸나? 한가지 방식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의 그림을 살펴보면 정신이 사랑한 꽃이 많지 몸이 사랑한 열매가 많지가 않다. 옛 사람들뿐인가? 비교적 오늘날 사람에 가까운 서구의 화가 반 고흐만 해도 죄 꽃 나무만 그렸지 열매 단 나무는 그린 것이 거의 없다. 물론 그가 그린 작품 중에는 과수원이 많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대개 꽃을 먼저 보게 된다. (그가 주로 그린 꽃나무는 배나무, 알몬드 나무, 복숭아나무 등이었다.) 반 고흐의 정신을 매혹한 것은 우선은꽃이었던 것이요, 그림이란 문장처럼 우선은정신의 인 것이다.

 

 

그림이 정신[心意]의 꽃이라고? ‘사물의 거울[形寫]’이 아니고? 하기야 그림은 정신의 꽃이요, 정신의 작품이다는 언명은 그림은 사람의 제작물이다는 언명처럼 너무나 빤하여 하나 마나 한 언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림을 재현representation 예술의 한 형식으로 보는 관점, 혹은 한 사물의 형태를 공통의 지각 능력의 임자들에게 지각되는 방식 그대로 고스란히 그림을 통해 재현[形寫]하는 일이 가능한프로젝트라는 생각은 의외로 질기게 이어 내려져 왔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는 거의 같은 방식으로 기능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만일 화가가 깊이나 벨벳의 감촉을 묘사할 수 있는 기호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자연에 필적하는 광경을 보게 되지 않겠는가[7] 말이다. 물론 그림을 정의하는 마당에서, 정신의 상징[기호]화다, 아니다 눈에 잡힌 사물의 (상징[기호]을 통한) 재현이다, 이렇게 양자 중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해야만 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를테면, 중국의 소위 문인화[8] 라는 화풍은 그림은 사물의 재현/모방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서 나온 것이다. 그만큼 전자의 측면에 대한 강조는 이 화풍을 강조한 이들에겐 중요한 것이었다. 하우저처럼 시각 예술에서. . .개념적 화면은 시각적인 것에 우세하다[9] 고 멋있게 언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역시 그림이 무엇보다도 정신의 표현임을, 개념idea의 매개 없이 그림은 창조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요컨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림이란 사물의 형태를 빌려 개진된, [정신]의 형식화[寫意]. [정신]만 잘 표현할 수 있다면 감각되는 사물의 형태를 얼마나 변형하든 그림에선 아무러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바로 이것이 그림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었다. (물론 약간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칸딘스키, 클레 같은 20세기의 거장들이 했던 생각을 미 푸米芾, 무 시牧谿, 위 지엔玉澗 같은 11세기, 13세기 중국의 거장들 역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중국의 거장들에 따르면, 정신이 높다면 그림도 높고 정신이 낮다면 그림도 낮다. 높은 정신? 그런데 이러한 것이 정말로 있다면, 이것은 사람의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10] 아니 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오감관으론 직접적으로 감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을 간접적으로 사람의 눈에 보여주는 자연 사물들은 또 분명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우 리 모두는 이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식물만 돌아본다면, 이를테면 대나무. 이를테면 소나무. 이를테면 연꽃. 이를테면 난초[]. 이를테면 바로 이 매화! 그리하여 인재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의 화목구등품론에서 이것을 1품의 자리에 올렸던 것이요[11], 백화암 주인 유박은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화목구등품제에서 이것을 1등의 자리에 올렸던 것이다.[12] 보는 이의 정신을 퍼뜩 나게 하는 서늘한 신격神格의 임자이기에, 한겨울 속에서도 정결한 자태로 소리 없이 가만 꽃을 피우는 선격仙格의 임자[氷姿玉骨]이기에 화품을 논하는 자리 자리마다 매화는 늘 1 1등의 자리에 올라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매화벽에 빠진 이들은 이조 시대만 해도 참으로 많았다. 아니 조선의 문인아사文人雅士 치고 매화를 꺼린 이, 멀리한 이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숱한 문인들이 자신의 별호에 자를 넣었으니 여기서 그 몇몇의 이름을 불러낸다면 다른 모든 이들에게 외려 누가 될 것이다. 요컨대 는 개결介潔한 정신, 고상高尙한 정신 그 자체의 응결체 혹은 그 정신의 표상이었기에, 개결과 고상이라는 높은 정신 경지를 추구한 이들의 상우尙友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매화 사랑, 매화벽의 표현법은 별호 짓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시서화라는 예술작품의 창작을 통해서였다. 그리하여 뉘 있어 이를테면, 조선의 매화시를 논할 적에, 퇴계 이황[13]이나 매월당 김시습만을 거론하고 만다면 그이는 큰 우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시를 지어 매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문사들은 많았다. 그런데 김석손 같은 사람은 손수 매화시를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화시 수집 (매화시편 앤솔로지 만들기)에도 지극한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니,[14] 무언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을 수집蒐集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 풍모가 화가보다는 차라리 도학자에 가까운 듯한 단원 김홍도 역시 언젠가 매화음梅花飮(매화시회)을 열기도 할[15] 정도로 매화벽이 있었던 사람인데, <서호방악>, <주상관매도> 같은 그의 매화 명편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매화를 사랑한 사람인지 우리 같은 후대인들 역시 어느 만치는 헤아려 볼 수 있다. 이 중 <주상관매도>는 배 위에서 암벽 위쪽에 붙어 있는 매화를 완상하는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그런데 여가 시간에 아무도 찾아 보지 않는 곳에 사는 매화 한쪽 남몰래찾아가는 그 정신이란 도대체 어떤 정신이란 말인가. 그가 그 암벽 위 매화를 통해 실제로 보고자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 님은 가고 그림은 남았으나, 그 그림 속에 님의 마음이 있으니 그 님은 간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다.

 

 

단원 김홍도보다 후대의 인물로 좋은 매화 그림을 남긴 이로 학산 윤재홍, 우봉 조희룡, 고람 전 기, 이 세 사람을 빼놓는다면 이 역시 무례이겠다. 학산 윤재홍의 <석매도>에는 사람이 있을 자리에 사람은 없고 학이 한 마리 있다. 사람은 학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거나 자신은 학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보통은 소나무와 학인데, 윤재홍은 소나무의 자리에 매화를 넣었다. 고람 전 기의 매화는 어떠한가? 그가 남긴 대표적 매화 그림인 <매화초옥도> 속의 매화는 꽃인지 눈[]인지 모를 매화가 그려져 있다. 하여 이 그림의 감상자가 눈으로 실제로 감상하게 되는 것은 단지 가 아니요, 차라리 겨울날의 깊음과 깨끗함과 한가함의 삼중주라는 음악이다. 그런데 화가는 이 그림에서 과연 보이는 사물로서의 매화를 그린 것일까? 윤재홍이 학과 돌과 매화를 함께 그린 것처럼, 전 기 역시 홀로 기거하는 한 초옥의 주인과 그를 찾아가는 그의 지우知友를 매화와 함께 그렸다. (그리하여 실은 사중주다.) 이 매화들은 정말로 형이하의 매화일까? 아니다. 이 매화들은 사물의 형상화라기보다는 도리어 정신의 형상화라 봐야 할 것이다. 선미禪味 높은 그림을 즐겨 그렸던 그가 한갓 식물로서의 를 상형했을 리 없다. 그러나 과연 이 <매화초옥도>의 작가가 저 <매화서옥도>의 작가(조희룡)만큼이나 매화벽이 있던 이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림의 선미에선 전 기가 으뜸인지 모르나, 매화벽에선 조희룡을 따를 자가 적어 보이는 것이다. 보라, 다음과 같은 광증의 임자는 바로 조희룡인 것이다.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 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叟라고 하였다.”[16]

 

 

조희룡(1866년 몰)과 전 기(1854년 몰) 이후 좋은 매화 그림을 남긴 이로 수화 김환기(1974년 몰)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적절한 예 차림이 아니겠다. 김환기는 매화 그림을 많이 남겼던 보기 드문 현대 화가로, (혜곡 최순우의 전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17]) 그의 삶과 언동을 살펴보건대, 그 역시 의 정신적 격을 지향했던 사람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그림엔 유독 항아리[백자]와 매화와 달이 많은데, 달과 항아리가 옛날의 둥글고 순후한 (삶과 인격의) 온전함이라면, 매화는 옛날의 (정신의) 고결이랄까. 그러나 그의 그림엔 어딘지 모르게, 전쟁의 참혹지경을 경험한 이의 우수와 그늘이 서려 있다. 여기 있는 온전함/고격에 대한 감격의 예찬보다는 옛 온전함/고격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그의 그림의 한 정조로 은닉되어 있다. 허허,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지붕 아래, 노스텔지어가 삶의 한 정조가 되는 시대의 지붕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되지 않는 매화 화론畵論은 이쯤에서 고만 멈추기로 하자. 동북아 한자 문화 전통의 매화시화를 제대로 모으자면 수삼년이 부족할 것이요, 그 모든 매화 작품들의 품격을 논하자면 십오야 십오주가 모자랄 것이다. 하니 그 중 시 한 수만 뽑아 감상해보는 것으로 이 어설프게 펼쳐 놓은 예찬 두루마리를 거두어보기로 하자.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의) 사랑의 편벽심을 (그리하여 높음사랑의 편벽심을) 이것으로 조촐히 갈음해보기로 하자. 이왕지사 중국에서 온 나무이니, 그래, 조선인의 것보다는 중국인의 매화시화 한 편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중국의 매화 작품들로 어떤 것이 좋은가? 모르긴 모르되, 진 농金農과 리팡잉李方膺의 것은 가히 최상품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 중 리팡잉의 시화를 한편 뽑아 함께 감상해본다.

 

 

그윽한 봄 기운에 담박함이 찾아와

마음 일으키니

어찌 이를 그려볼까, 어찌 공부한 바를 써볼까

화가는 가만 생각해보네

찬 향긴 반만 떨어지는데

푸른 구름은 밖에 있구나

학은 울고 달은 밝은데

맑은 꿈은 저 홀로 외롭구나

높은 뜻의 붓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느니

이로써 내 마음 또한

하나를 흠모하는도다

 

-      리팡잉, <澹入春烟(담입춘연)>[18]



[1] 주지하다시피 [산림경제山林經濟] 저술서가 아니라 편집서로, 여러 책들의 자료를 편집한 것이다. 인용문구는 [신은]라는 책이 원 출처로 [산림경제]에 선정되어 수록되어 있다.

[2] 정상문, 내 몸을 맑게 하는 차, 2005, 241

[3] 때로는 Plum 이라고도 한다. Japanese Apricot과 관련하여 첨언하자면, 동북아시아의 문화를 번역한 대표적 알파벳 언어인 영어는 그 역사적/문화적 친일[일어]성 탓에 동북아 문화의 대표주자로 먼저 일본을 꼽는다. 그러면서도 그 문화의 뿌리가 중국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중국 역시 한 대표주자로 꼽아준다’. 더욱이 중국이 다시 부상하는 이즈음은 완연히 그러한 추세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은 거의 명시되지 않는다. 설사 한국을 명시하고 중시하려는 이가 있어도 그이가 참조할 영어 문헌이 상대적으로 많지가 않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일본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보려는 이가 참조할 영어 문헌은 너무나 방대하다. 그리하여 한국을 제외한, 중일 문화 언급의 역사는 반성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한국 무시 혹은 가치 폄하는 영어권에서 오래된 지식 문화 풍토가 되어 버린 느낌마저 있는데, 참으로 역겨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일본 지식인들, 영미권 지식인들의 반성과 전면적 문화 재학습, 번역어 수정 작업이 요청된다. 아울러 한국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그 모든 이들의 각성과 문화 재학습 역시 요청된다.    

[4] 정상문, 위의 책, 241-242, 274

[5] 정상문, 위의 책, 274-275면에서 재인용

[6] 그런데 이 꽃의 꽃말은 결백潔白과 미덕美德이다. 이 꽃 자체의 대표 상징은 하얀 깨끗함과 아름다운 덕인 것이다.  

[7] 모리스 메를로 퐁티 (김화자 옮김),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2005, 33

[8]  문인화의 화풍은 훨씬 오래된 것이지만, 이 개념을 처음으로 명확히 사용한 사람은 중국 명 말기의 똥 치츠앙董其昌이다. 보통 문인은 여기로서 그림을 그릴 따름이고 주로 그림 작품은 전문화가들이 생산해 왔는데, 명대 중기 이후 문인화가가 전문화가를 압도하게 되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 개념은 아마도 이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리라.  

[9] 아르놀트 하우저 (황지우 옮김), 예술사의 철학, 1983, 394

[10] 물론 눈은 정신과 관계하지만, 정신과 관계할 때의 눈의 활동을 읽음’, ‘꿰뚫어봄’, ‘알아봄이라 하지 그저 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지각함/감각함/봄이라는 눈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정신 활동과 관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우리의 오랜 언어 관습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할 수 없게 한다.   

[11]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매화 편

[12] 정 민,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2007, 183

[13] 퇴계 이황의 매화시는 총 85 118에 이르는데, 그의 매화 사랑은 이처럼 지극하여 조선의 대표적 매화벽의 임자로 거론할 수도 있겠다. 

[14] 정 민, 같은 책, 191

[15] 정 민, 같은 책, 같은 면

[16] 그의 저작 [석우망년록]에 나온다는 내용으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희룡 편에서 재인용.

[17] 최순우,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2002 를 참조

[18] 李方膺梅仙, 2009, p. 57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