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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물과 지구를 위한 미술관

곰의 고독-다케우치 세이호, 아서 테이트

by 유동나무 2021. 3. 22.

늘 누군가 곁에 없어 외롭고, 남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좋아요에 늘 신경을 쓰는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곰은 하늘 아래서 외따로, 의연히 살아가는 동물이다. 이 녀석들만큼 비-사회적인 동물도 우리 지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서, 곰들은 제각각, 고독하게, ‘살아가기라는 과업을 수행한다. 수컷의 경우, 엄마 뱃속에서 나와 2년 정도(18개월~20개월)가 지나면 독립하는데, 암컷과 사랑을 나누는 기간인 약 1개월을 제외하면 줄곧 독거생활을 고집한다. 이에 비해, 암컷은 가족생활의 기간이 다소 길다. 마음을 줄 수컷을 만난 암컷 곰은 수태 후 약 2년간 새끼들을 길러내며 공동생활이라는 특별한 삶을 산다. 하지만 곰의 평균 수명이 약 26년이라 하니, 26년 중 2년은 그리 긴 세월도 아니다. 새끼들이 슬하를 떠나면, 그녀 역시 그처럼 독거생활이라는 자신의 진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생에서 혼자 산다는 것. 어떤 의미일까? 야생과 장벽을 쌓은 채, 도시나 마을 안에서 무리 지어 살아가는 무리 동물인 우리로서는, 아니 하루 이틀 산에서 비박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한두 달 산에서 텐트 치고 홀로 지내보라고 누군가 제안한다면 기겁을 할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짐작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본 화가 다케우치 세이호(Takeuchi Seihō, 1864~1942)가 그린 작품 <눈 속의 곰> 같은 것을 보며, 그들의 고독한 삶을 아주 조금 추정해볼 수는 있지 싶다.

 

다케우치 세이호, <눈 속의 곰>

 

그러나 곰의 독거에는, 인간의 독거와는 달리, 정결한 면모가 있다. 데지마 게이자부로가 쓰고 그린 책 아기 곰의 가을 나들이(정근 옮김, 보림)에 잘 묘사되어 있지만, 곰은 신선하고 때깔 좋은 과일이나 견과류나 풀 또는 먹기 좋게 살이 붙은 동물을 먹고 산다. (주로 육식을 하는 북극곰은 예외이긴 하지만) 하지만 습성이나 섭취하는 먹이의 양을 보면, 대체로 채식에 편향되어 있고, 심지어 어떤 종은 비건주의 또는 비거닝에 경도되어 있다. 이들은 자연이 마련해놓는 를 거스르지 않는다. 철마다 숙성하는 식물의 잎과 열매를 알아보며 그것에 감응하는 식사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성욕의 해결도 시절 인연에 그저 내맡기고, 자식에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투사하지도 않으니 어쩌면 탐욕과 허무에 시달리며 사는 일부 호모 사피엔스들보다 좋은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르며, ‘신기독(慎其獨)’ 같은 유학의 언어는 곰보다도 못한 원숭이들의 후예에게나 긴요한 언어인지도 모른다.

단 한 번뿐일 지상의 삶. 곰들처럼 우주를 직접 맞대고, 욕망의 실현이라는 엄중한 과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며 외외당당 살아갈 수는 없을까. 그러나 먹이가 부족해지면, 곰도 가난하고 쓸쓸한 뒷모습을 보일지 모른다. <눈 속의 곰>이 보이는 뒷모습처럼…….

<눈 속의 곰>에 등장하는 곰은 아마도 아시아 흑곰일 것이다. 곰은 지구상에 총 8종이 서식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아시아 흑곰(지리산에도 살고 있는 반달가슴곰이 여기에 속한다), 아메리카 흑곰, 북극곰, 큰곰(불곰, 그리즐리), 말레이곰, 느림보곰, 안경곰, 자이언트 판다가 그 주인공들이다.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로서는 아시아 흑곰이 그나마 친근하지만, ‘곰 부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아시아 흑곰조차 볼 기회가 드무니 허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야생동물을 주로 그렸던 영국계 화가(리버풀 근교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날 아메리카로 이주한다) 아서 테이트(Arthur Fitzwilliam Tait, 1819~1905)의 작품 <일촉즉발-곰 사냥, 초겨울>에서 우리가 만나는 곰은 아메리카 흑곰이다. 곰과 마주 보고 있는 사내의 오른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는 이 상황을 직접 겪었고, 또 곰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살아남았을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흑곰 역시 육식주의자는 아니다. 이들이 먹는 먹이의 85%는 식물성이다.)

 

아서 테이트, <일촉즉발-곰 사냥, 초겨울>

 

사진작가이자 산문작가, 무엇보다 야생의 자연에 대한 호기심 많은 탐구자, 그런 점에서 천성적인 박물학도(naturalist)였던 호시노 미치오의 운명은 이 그림 속 주인공과는 달랐다. 19968, 호시노는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곰에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아서 테이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냥꾼들, 즉 곰에게 적대적인 이들은 왜 살아남고, 곰에게 호의적이었던 호시노는 왜 살아남지 못했던 걸까? 호시노의 죽음은 내게는 내내 곱새겨볼 물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그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단순 사고에 불과한 걸까? 아니라면 그것은 야생에 지나친 탐구욕을 가진 이들에게 대자연이 늘 보내곤 하는 경고음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호시노는 일시적으로는 비극이었을 죽음의 형식으로, 늘 대자연에 소속되려 했던 자신의 염원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완성했던 건 아닐까?

(큰곰, 아시아 흑곰)은 캄차카 반도의 아래쪽, 오오츠크해의 건너편, 우리 민족이 살아온 이 땅에서도 오래 서식했던 동물이다. 무엇보다도 곰은 고조선의 동물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웅녀(熊女)의 후손들이 아니던가. 환웅이라는 남자 그리고 곰으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된 웅녀. 이들이 우리들의 원시 조부모가 아니던가. 그러나 토템으로 곰을 모셨던 그 민족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잔혹하게 곰을 착취하고 있는 민족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한국은 웅담(곰쓸개/쓸개즙) 채취를 위한 곰 사육이 합법화된 지구상의 단 2개국 중 하나인 것이다. (또 하나의 국가는 중국이다.)

다행히, 이 땅에서도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1812월 녹색연합은 사육되던 반달가슴곰 세 마리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온라인 모금을 통해 이들을 매입해 동물원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옮겨준 것이다. 한편,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에서는 2004년 이래 반달가슴곰을 야생(지리산)에 돌려보내는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20185월 기준 지리산에 53마리가, 지리산 바깥에 3마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자연()을 도구나 노예로 취급하는 문화가 기승을 부렸던 이 땅에도 이제는 빛줄기가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출발에 불과하다. 복원되어야 하는 건 단지 멸종위기 생물종이나 그들의 서식지만은 아닐 것이다. 경제림 대 원시림의 비율이 거의 100:0에 가까운 어떤 신기한 나라에서는, 원시림이,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또는 곰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땅이 조금이라도 복원되어야 한다. 복원되어야 하는 것은 어떤 심성이기도 하다. 곰의 힘, 곰의 영혼, 곰의 영력(靈力)을 어려워하며 존중했던, 고조선을 세웠던 이들, 바로 우리 선조들의 심성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심성이 다시 이곳에 찾아오려면 곰에 다가서는 마음, 삶의 주체인 곰의 면모를 알아가는 시간이 먼저일 것이다.

 

*근간 <동물과 지구를 위한 미술관>(가제)에 실리는 산문 1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