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내 한 가지 樂은, 집 앞 일본헌책방 후루 혼 야에서 주말마다 몇 권씩 헌책 사기. 사고는 쟁여놓기만 한다, 읽지는 않고. 그러나 이것들은 언젠가는 한달음에 죄 읽어치울 책들이다. 손바닥만한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손바닥보다 큰 그림책도 산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부쩍 그림책이 좋아졌다. 왠지는 내도 모리겠다. 그저, 한숨을 너무 많이 쉬어서 그런가보다, 이런 소리를 내 귀에 멍덩하게 흘려 넣고는 꼴 먹은 소처럼 흥흥 자족할 뿐인데. 그림책을 찾는 내가 나는 밉지 않다. 기특하다.
한의사는, 그러니까,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온 의사는, 나더러 술 마시지 말라고 그런다. 술을 마시면 장기가 더욱 나빠질 것이라는 시덥잖은 소리를 킁킁 해댄다. 그런데 이 소리는 나더러 즐거움 없이 살라는 말이나 진배없다. 樂 없는 인생이 인생인가. 樂 없이 사는 생명체는 이 세상에 단 한 개도 없다. 이것이 내 지론이고 믿음이다. 하느님은 우리들을 즐거우라고 만들었다. 기쁘라고 만드셨다. 그러니 나라고 하는 우주의 한 一葉도 樂을 조금은 누리며 살어야 하질 않겠나. 아무리 고명하신 의사 선생님이시라도 술 마시지 말라 따위의 숭악한 소리는 입에 물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래 믿는다. 그렇게 믿어보는 것이다.
술은, 마셔보니, 농탕한 술보다는 한아한 술이 좋다. 질펀하니 끈적끈적해지고 몽롱해지는 술보다는 한아하니 처연해지는 술이 좋다. 한아한 술을 마시려면, 우선 둘러앉는 머리의 숫자부터 줄여야 하는데, 이즈음 만날 화붕이 없어 주로 홀로 소적하니 고조곤히 잔을 기울이는 나로서는 머리 숫자 줄일 걱정만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한아한 술을 마시려면 또 밤저녁보다는 낮이 좋은 것 같다. 낮 중에서도 일요일이나 토요일 한낮이 으뜸이다. 특히 일요일 한낮은 러시아형식주의자들의 적이다. 쉬클로습스키의 적이고 토도로프의 적이다. 이들의 적이니까 의당 내 적이기도 하다. 여남지교합도 하려면 이런 때에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날에는 어쩐지 운우지락보다는 술을 마시는 일이 훨씬 재미나다. 일요일 정오에 꺼내놓는 작은 교자상. 이것은 새로 사귄 애인의 목소리보다 몇 배는 더 정겹다. 너무 쓸쓸하지는 않으면서 적당하니 적적하고 심심한 술잔을 몇 잔 또로록 기울이다 보면, 문득 사람의 주둥이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리워지는데, 지인의 정담도 없고 낯선 친구의 화두도 없으니 대신 책을 몇 권 아무렇게나 꺼내어 읽어본다. 그러나 몇 잔 술이 또 또로록 들어가면 산문은, 한밤에 고성방가하는 이웃집 여자처럼 어느덧 미워지기 시작해, 시를 중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도 몇 걸음 더 나아가면, 시는 노래가 되어 내 귀에 편편 들리어 온다. 생각하여보면, 시는 결국 노래하라고 있는 것인데, 고개를 뻗대고 있으면서 음률이 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거절하는 시들은, 그 꼴불견인 모양새가 꼭, 남의 구두를 신고 제 구두인 체 하는, 몬생긴 신데렐라 후보들마냥 볼썽사납다. 노래로 살려내기 힘든, 소위 어렵다는 시보다는 소박한 가락이 우러나는 한 편의 동요가 나는 더 시답게 여겨진다. 일요일 한낮에 흰 종이 검은 글자를 보고 흥얼흥얼 나부대는 꼴이란 이 맛을 모르는 이의 눈에는 꼭 미친눔의 미친짓거리일 테지만, 적어도 이 멋을 즐기고 있는 동안에는 이 꼴 이외에는 전부 내 모습 같지가 않아서 낯이 설다. 낯이 설다, 고 하는 이런 생각은, 그러나, 일요일 한낮의 꿈을 꾸고 난 후에도, 나는 줄곧 함시롱 산다.
2007.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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