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글날이다. 한자를 배워보고 영어를 배워볼 수록 한글에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아마도 그의 인생 기간 중 “無慾의 시대”라 부를 수 있는 유년시절에 한글과 함께 한 사람일 것이다. 글자를 쓰진 못했지만, 입말을 들을 수는 있었던, 입말도 제법 할 줄 알았던 그 시절, 그가 하룻밤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본 감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를 그는 감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라 부르는 이외에는 이들을 달리 부르는 방법을 아지 못했다. 하므로, 그 때의 감, 대추, 포도들이 주던 어렴풋한 감각, 대추나무 잎의 시원함과 포도나무 그림자의 서늘함과 감나무 나뭇가지의 의연함의 느낌도, 모두 이 낱말, 그가 어머니, 할마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관찰하며 따라 불렀던 감, 대추, 포도라는 낱말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은 주체가 세계를 자기화하는 가장 기초적인 도구로서, 이 원초적 자기화의 체험은 곧 원초적 자기형성의 체험이므로, 주체는 오직 모어를 통해서만 최초의 자기 형성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도구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신체의 연장기관과 같은 특별한 도구로서,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세계로 하여금 우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회적 생존 혹은 실존적 생존에 근본적인 물질이다. 나도 모르는 나를 어렴풋하게 세계에 알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것으로 변형시켜놓는 것이 바로 이 말의 힘이고, 알 수 없을 것 같은 세계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형질과 윤곽과 의미를 지닌 어떤 것으로 변형시켜놓는 것이 이 말의 힘이다. 알 수 없는 사람은 이 낱말로서 나의 어머니로 밝혀지고, 알 수 없는 나는 이 낱말로서 포도나무를 좋아하는 한 아이로 밝혀지는 것이다. 이 알려짐의 밝혀짐의 최초 체험을 가능케 한 입말 - 그 세계를 어떤 사람이 탈출할 수 있을까. 탈출에의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겠다는 것인데, 이 세상에는, 안타깝게도,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없다. 자살하는 사람은 그 순간 죽음이 행복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 불행이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지,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늘은 한글날. 그러므로 오늘은 자신의 “무욕의 시절”에 어머니, 아주머니, 할마씨들에게서 들은 이 입말로써 세계에 자기 얼굴을 그려보고, 감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를 ㄱ ㄷ ㅍ 의 음으로 어렴풋이 반복하여 불러본 이들을 위한, 이들 모두가 하나의 어머니-뿌리에서 자라난 잎꽃들임을 확인하는 날이다. 아, 이 날은 독립 국가가 수립된 날보다 기쁘지 아니한가. 이 날은 전쟁이 종식된 날보다 기쁘지 아니한가.
2007.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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