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치자명春雉自鳴. 봄철 꿩이 스스로 울다 -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제출물로 한다는 뜻으로 부정적으로 보면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어쩐지, 이즈음 이 몸의 상태랄까, 욕망의 상태랄까 하는 것을 짚어내는 말 같기도 하여 한번 소리 내어 읊어본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번 울어보고 싶어 목을 뽑아보니, 봄이더라는 말이고, 다른 봄이 아니라, 정신의 봄, 관계의 봄, 철학의 봄, 문장의 봄이라는 말이다. 하여간 나는 싸릿문을 열고 성큼 나아가 목울대를 울림시롱 길게 한번 기운차게 울어봐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간 해왔는지 모르고, 그런 울음을,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허공을 향하여 실컷 울어보고 있는지 모른다. 이를테면 김연수가 무대에 오른 지 10년이 지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성숙된 기량을 보여주었듯이, 문밖의 무대는 글쓰는 이, 창조하는 이에게 어떤 단련의 계기를 줌에 틀림이 없고, 작가의 발표와 만남이란 산중승려의 삶으로 보면, 안거 뒤의 나들이 정도일 것으로, 이 나들이는 안거의 시험대이자 다음 안거의 밑거름이 될 터인즉, 문밖을 허정허정 무턱대고 나가 한번 울어본들, 이 울음이 창조력을 소진시키거나 창조 행위에 역행하는 효과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어보는 것이다. 이런 믿음 속에서 내친김에 스카이 콩콩 타고 쭉쭉 앞으로 나아가 한번 더 목청 돋우어 울어예보는 것인데, 운동장에 잔디는 잘 깔리었는지 발로 쿵쿵 밟아도 보고 껑충 뛰어도 보는 것인데, 와중 잠시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선가 봄철 꿩이 스스로 울고 있어, 놀랍더라, 라는 말이다. 이문열이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에서 보여주었듯이, 아무리 문장에 달통한들 문장 안에 진리와 선에 대한 절곡한 지향이 없다면, 한 문사의 글은, 벌 무리를 향해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꽃의 아름다움과 다를 바가 없어서, 세계의 운행에 어떤 식으로든 일조를 하겠지만, 세계를 조각내어 신세계를 열어젖히는 인류의 거사에는, 나의 비밀을 열어 관계의 열락으로 나아가는 개인의 혁명에는 아무런 보탬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먼저 했던 선배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봄시롱, 누군가 시키는 바가 있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내 인생을, 이 인생의 울음을, 울밖에 나가 신명나게 울어, 시작하는 이 봄과 공명해보고 있는 것이렸다. 문장의 봄, 철학의 봄, 관계의 봄, 정신의 봄, 그리고 이것을 모두 하나로 합친 사랑의 봄과.
2007.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