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armon에서 Long Bay로 향하는 길을 걸어볼까 하는 마음에 문득 나선 길의 기억이 마음에 찰싹 붙어 있다. 때는 한낮이었고, 점심을 끝낸 나는 얼마간은, 그러니까 몇 시간 즈음은 하던 일에서 놓여나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된다는 것을 홀연 자각했을 것이다. 그니까 이는 하나의 요청에 대한 발견인데, 달리 말하면, 어디선가 들려온 하느님의 권유에 대한 “예이~” 조의, 혹은 경상도 사투리 “야~” 조의 응답인 것이다. 이리하여 길을 나선 나는 아타몬 리서브를 지나 Oval 너머 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인데, 다시 등장한 윌로비 쪽의 리서브를 걸을 적에, 문득 벤쿠버의 스탠리 파크를 걷던 날이 생각에 떠올랐던 것이다. 시드니는 정말 기이한 곳이어서, 시티의 치나 타운을 걷고 있을 때는, 아, 이 도시는 정말 재수 없는 도시다, 정 안가는 도시다, 하는 생각에 다시금 돌입하게 되지만, 이런 한적한 공원과 산책로를 걷다보면, “네 지금 있는 곳에 만족하는 것이 평화에 도달하는 곧바른 길이니라” 하는 하느님이 음성이 곧장 들려옴시롱, 시드니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이 도시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작은 타운들을 하나의 섹터로 거느린 타운결합체라는 느낌을 준다. 지리산, 금강산이 하나의 산이 아니라 산들의 묶음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리하여 요건이 허락하고 마음만 달리 먹으면, 이곳에선 시티에 나가지 않고, 시골에 사는 것 같은 한적한 생활도 누려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는 무엇보다도 “이곳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별천지가 필요한데, 그러한 별천지를 그날 스탠리 파크를 기억하는 와중에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별천지를 만나면서 나는 다시 한번, “더 아름다운 곳, 더 쾌적한 곳, 더 청량한 곳, 더 싱그러운 곳, 더 많은 풍요와 만족이 있는 곳”을 향한 세상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추구는, 어떤 경지에서는 더 없이 어리석은 것이로구나 하는 자각에 몸서리를 쳤던 것이다.
실인즉, “더 볼 만하고 아름다운 곳, 더 한적하고 흡족한 기분을 자아내는 곳”에 가서 머무르려는 것은 이 세상 만인의 보편적인 마음이긴 하나, 세계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을 현실에서 구현해보려고 계획을 한다거나 또 이런 계획을 안고 여장을 꾸려 떠나는 법이 없다. 그들의 대부분은 주어진 삶의 터전의 일정한 테두리에서 머물다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소위 여행자 혹은 관광객 혹은 연구자들을 그 테두리에서 만나기는 하나, 여행자, 관광객, 연구자와 같은 아웃사이더, 유목민의 대열에 단 한 번도 참여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궁핍해서가 아니라, 그들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그러한 욕망과 그 욕망의 실현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 상할머니, 외할머니만 해도 이러한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살다 가셨지만, 외할아버지는 그만 대도시의 삶을 잠깐 체험하시고 돌아가셨다. 그렇기는 하나 외조부께서 대도시에 머무신 것은 마땅한 거처를 잠시 잃으셨기 때문이지 요새 식으로 어떤 “이주, 이민”을 한 것은 아닌 것이며, 그분께서 몇 번의 국내 여행을 제외하곤 다른 여행을 하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내 외조부만 해도 “주어진 곳을 사랑하여 그 테두리에 머물다 가는” 전통적이고 세계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따르셨던 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지금도 세계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서구인이나 서구적 삶에 동화된 이들이나, (물론 나를 포함해서), 그들의 망상과는 달리, 어떤 소수자적인 처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마음자리에서는,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더 좋은 곳, 더 깨끗하고 청신한 곳, 더 그윽하고 평화로운 곳”에 가보자, 가고 싶다는 변치 않는 욕망이 하나의 강력한 병원균처럼 똬리를 틀고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빈 마음에 평화” 라는, 지금도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러한 끊이지 않는 욕망의 수인들이야말로 평화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평화와 관계 없는 이들은 소수이지 다수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이 리서브 안에 있는 별천지에 들어서면서 떠올랐던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러한 순간엔 생각이 찾아올 겨를이 없다. 온 몸이 느낌의 한 기관이 되어, 그 별천지가 주는 느낌을 받아들이기에 바쁜 것이다. 한 십 분을 채 못 들어가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물소리가 나는 곳의 탁 트인 곳이 나왔고, 그 탁 트인 곳 바위에 기대 물소리를 감상하고 있던 두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타몬 오발에서부터 눈에 띄었던 바로 그 두 소녀다. 한쪽은 키가 좀 크고 한쪽은 작은데, 아직 세간에 때가 묻지 않은 고운 얼굴들이다.
“안녕?”
“안녕?” “안녕?”
“참, 이 길이 롱 베이로 가는 길 맞어?”
“모르는데...미안해” “미안~”
앞에 길이 끊겨 잠시 헤매다가 다시 길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들러 보니 그 두 소녀가 서 있던 곳에는 아무도 없고, 대신 새소리만 있다. 그 자리에 가서 가만 서 있으니, 새소리에 물소리도 묻혀 들려온다. 평일 한낮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별천지에서, 있지 말아야 하는 곳에 가 있는 사람만이 들어보는 물소리다.
2007. 6. 2.
'이전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일보와 초등지성 (0) | 2010.01.04 |
---|---|
두 가지 樂 (0) | 2009.12.29 |
한글날 (0) | 2009.12.29 |
春雉自鳴 봄철 꿩이 스스로 울다 (0) | 2009.12.29 |
Ergo Sum (0) | 2009.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