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의 글이다. 당시엔 트위터란 게 없었지만, 이 몸이 왜 트위팅을 얼마간 경계하는지 그 연유가 이때 쓴 글에 조금 나와 있다. 느긋한 대화. 깊이 이어지며 새로온 물길을 열며 나아가는 대화. 차와 술을 곁들인 이러한 대화의 맛과 멋을 어떻게 “온라인 채팅 광장”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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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bbeys Bookshop에 들러 {satisfaction} (그레고리 번스 작)의 실물을 확인하고, 서문의 일부를 읽어봤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도파민이 어떻게 해서 뇌에서 생성되는지가 밝혀졌는데, 밝혀진 연구결과에 따르면, 도파민을 발생시키게 하는 계기는 다름 아닌, challenge 와 novelty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도전할 만한 것이 앞에 있어서 이를 극복하고 해결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또, 무언가 삶에 자극이 될 만한 신선하고 낯선 것을 만남으로써 인간은 도파민을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이러한 결론은,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을 성취했는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무엇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 설정이자 그 방향으로의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하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성취해내거나 경험하거나 소유한 이후에는, 이미 성취한 것, 이미 경험한 것, 이미 소유한 것에는 눈길을 더 이상 돌리지 않게 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번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들에게서는 더 이상 도파민의 source를 발견할 수 없는 탓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성취 이후에는 즉시, 다른 새로운 것, 다른 도전할 만한 것을 찾아 또 다른 여정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파민을 찾아 끝없이 해매는 인간 본질은 결국, 미래에 끝없이 끌려가는, 당도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괴물에 끝없이 개처럼 끌려가며 불만족을 만족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욕망의 囚人으로서의 인간 본질을 말해줌에 다름 아니다. 기억을 끊임없이 잃어버림으로써 과거의 경험-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의 본원적인 비극을 잠깐 여기서 다시 상기해본다면, 인간은 실로 과거 - 흘러간 시간으로부터 찢김을 당하고, 미래 - 오고 있는 시간에 붙들려 그곳으로 (도파민을 찾아) 끌려가고 있는, 이중적인 囚人이 아니겠는가.
망각에서 오는 소외의 괴로옴은 내러티브의 재구성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갈망에서 오는 끄달림의 괴로옴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사실 도파민이 발생될 수 있도록 찾아다니는 인간의 여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질문은 무가치하겠으나, 정작 애써 공들여 찾아낸 것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음에 찾아낼 것이 무언가를 궁리하는 인간의 모습, 그러니까 새로운 도파민의 발생 처소를 킁킁 찾아 해매는 인간의 꼴을 두고 어찌 처량하고 한심한 것이라 얘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므로, 위의 질문은 우리의 삶에 유효하다. 치유는 결국 관조하기, 음미하기, 라는 일상적인 삶의 훈련에 있지 않을까. 관조의 대상은 안팎이어야 할 것이며, 음미의 대상은 이미 더 이상 도파민의 발생을 유발하지 않는 것을 포괄해야 할 것이다. 관조와 음미가 깊어질 때, 시간은 차원 이동하여, 새로운 시간으로 변모하는데, 우리는 그리스인들을 따라 이 일상을 벗어난 시간을 카이로스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카이로스는, 그러니까, 깊음에서 오는데, 깊음은 결국 깊음을 자아내는 관조와 음미의 훈련에서 온다.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사랑한 사람을 다시 사랑하기,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고, 옛 친구에게 돌아가 알지 못했던 점을 다시 알아보기, 말하자면 이러한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만이 novelty와 challenge를 찾아 거리를 해매는 끄달림으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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