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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참 만사예정설에 대하여

by 유동나무 2009. 12. 21.



오늘은 인간의 業과 緣에 대해 생각해본 날이다. 이걸 생각해본 것은, 버우드 울워쓰 - 수퍼마켓의 이름 - 의 계산대에서 계산 차례를 기다리면서이다. 이 때 내 앞에는 한 노파가 있었다. 나의 주목을 끈 것은 노파의 얼굴이나 행색이라기보다는 노파가 구입하려고 하던 상품의 세목들이었다. 그니가 사려고 한 것들에는 빵, 우유, 인스턴트 콩, 인스턴트 야채, 몇 가지 과일, 담배,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것들, 또, 커다란 감자 한 꾸러미가 있었다. 이것이 눈에 띄었던 것은, 그것들 모두가 평소에 내가 구입해보지 못했던, 않았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쇼핑 목록에서 배제하려고 애를 쓰는 온갖 humble food, 오염된 음식……그니가 구입하고 있었던 것은 전부 그런 종류의 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니의 모습과 행위에 잠시 시선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니의 모습, 쭈글쭈글한 손과 얼굴, 싸구려 츄리닝 바지, 지갑에서 지폐 50달러 대신에 동전과 잔돈을 죄 긁어모아 값 36달러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잠깐 “이것은 누가 시켜서 보고 있는 것이다”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이 마주침은 하나의 우연이 아니고,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라는 흔해 빠진 생각. 이 흔해 빠진 생각을 풀이하면 이렇다 ;


나는 어찌하여 지금 이 계산대에 서 있게 된 것인가. 쇼핑을 잠깐 하려고 마음을 먹은 탓이다. 그런데 이것은 영환으로부터 “기차가 운행을 안 하는 바람에 오늘은 만날 수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고, 영환이 그런 전화를 한 것은 기차가 운행을 잠깐 정지했기 때문이고, 기차가 운행을 정지한 것은 폭우 탓이고, 폭우가 내리고 있는 것은 지구 전체적인 기상 이변의 한 현상이고, 이런 기상 이변을 초래한 것은 결국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이고, 이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의 총체에 나는 지금 쇼핑 행위로 참가하고 있는 것이니, 내가 지금 이 계산대에 서서 이 노파를 보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지금 계산대에 서 있다, 서 있었다는 것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미리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이런 “만사예정설”을 늘 붙들고 있다면, 어떤 당황스럽고 억울한 지경에 봉착했을 때 울鬱과 분憤의 지옥에 빠지는 대신 “허허 그것 참 허허”의 세계에 머물 수 있지 않을는지. 물론 이 “허허 참 만사예정설”이 오용될 경우, 사회적 불의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는 악마적인 생각을 뒷받침하는 데 쓰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이 타자(사물/사람)와의 관계에서 봉착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 만사예정설은 모종의 효자손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령, 지금 꼭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 비틀어졌을 때, 내가 예상했던 것과 실제 발생했던 것이 크게 어긋났을 때, 마음과 말이 두동져 자신이 미워질 때, 내가 전달한 것과 그니가 받아들인 것 사이에 오해의 심연이 발견될 때, 예측했던 시간을 훨씬 넘어 일이 진행되어 다음 일에 차질을 줄 때, 우리는 개인적 “계측 이성”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우리가 공통으로 속해 있는 이 우주의 수레바퀴를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우주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만사예정”의 법칙 아래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분명한 것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는 언제든, “허허 그것 참 허허”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그의 마음은 언제든 “일을 꾀하는 것은 부질없을 때가 많다”는 생각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爲를 보는 無爲의 눈”으로 세상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미확정성, 미결정성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독립되어 활동하는 주체의 고착성”이 미약해지는, 삶의 대화적 운동의 본질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각자의 삶과 경제는, 미정의 운동으로서 나아가는 공동의 노력으로 이룩되는 것이다, 는 자각에 눈뜰 때, “나”는 없어지고 공통의 관계만 보이는 자발적인 사회적 협력과 사랑의 공간만이 인간의 삶을 보람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다, 는 자각에 눈뜰 때, 그의 앞에는 비로소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담배와 커다란 감자 꾸러미들이, 자기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타자의 고통이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록 그가 그 타자의 고통을 당장 해결해줄 수는 없을 지라도, 이 타자의 고통을 궁극적으로 해결해내는 것은, 이러한 시선들의 열림인 것이다……. 

 
2007년 6월의 어느 날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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