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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와 헌재 사건: 한국사회에 필요한 두 기초

by 유동나무 2009. 10. 30.

복거일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이야기의 실을 풀어보자. 이 사람은 이를테면 복거일[의 담론]을 그닥 과히 나쁘게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물론 [여러 쟁점에 대한] 그의 입장은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그는 자기 주장을 합리적으로 전개할 능력과 교양과 태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주장을 펼친다. 그 주장이 무엇이든 말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복거일[의 담론]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생각이기도 하지만, 고종석의 복거일론/관에 동의하면서 더욱 가지게 된 생각이다. 

복거일에게서도 우리는 배울 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삼인행 필유아사언 - 이런 차원에서, 혹은 타산지석 - 이런 차원에서 배울 바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이의 말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엉터리 가운데, 필요한 것, 똥덩어리 가운데 섞여 있는 옥 - 

이것을 이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합리성이다. 말에 스며 있는 이성의 힘이다. 보편적 지식/판단력을 가리키는  말인 <상식>을, 상식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합리성이다.  그리고 이 보편적 합리성이 우리네 사회적 삶에 유효하고 중요함은 우리가 나날살이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존중되고 존속되는] 법, 규율, 에토스를 통해 확인된다.    

한국에서 지금 중요한 건 좌파적 진보 이념의 실현도 아니고, 복지국가의 이상도 아니다. 사회주의 - 이런 단어는 입에 담지도 말자. 

리영희 선생이 제대로 지적했듯, 한국인이 정치적 인권을 지닌 존엄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그러한 존재로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로, 한국인의 정치적 존엄인으로서의 나이는 이제 겨우 22세라 할 수 있다. 

그 22년 동안, 삶의 여러 부면에서 남한사회에 많은 진보가 있어왔다 하나, 올해 일어난 큰 사건 - 용산 참사와 <헌재 사건. (2009. 10. 29의 미디어법 관련 판결문 발표 사건 - 그래 이것을 하나의 해프닝이라 부르자. 이만한 코미디 - 살며 보기 힘들다. )은, 한국이 여전히 <기초>가 빈약한, <부실 공사 사회>임을 실감케 한다. 

이것을 MB 정권 들어 진행된 <역사의 후퇴>라 보지 말자. 노무현 정권과 이 정권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이전 정권에서도 <말이 안되는 일>은 많이 자행되었다. 이전 정권에도 기초는 부실했다.  

용산 참사: 가난한 이들의 군락지대 - 삶의 터전을, 공권력이 그 기반을 떠받치고 있는 어떤 불도저들이 쓸어냈다. 살던 이들은 합당하게도 이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국가가 하위폭력기구를 동원해 그 항의를 묵살하고 군사적인 방식으로 진압하였다. 그 과정에서 몇 사람이 사망하였다. 

이런 천인공노할, <말이 안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후, [법을 어긴/죄를 지은] 국가는 사과는 커녕 아무러한 보상 조치에 나서지 않고 있다. 

- 어떻게 이런 비상식적인 사태가 버젓이 이 세계에 가능할까? 

- 어떻게 이런 것이 22년간 민주주의를 이어온 한 국가의 수뇌를 장악한 이들의 정신세계에 (만일 그러한 것이 있다면!) 허용될 수 있단 말인가? 

- 어떻게 국민들은 (비록 그 정치적 존엄인으로서의 나이가 겨우 22세라 하지만) 그러한 정부를 자신의 정부라고 그냥 놓아둘 수가 있는가? 

이러한 비상식적 사태의 존속 - 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 이외에 좀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논의를 할 때가 아니므로, 다음의 사태로 바로 넘어가보자. 

헌재 사건: 악법이 만들어졌다. 혹자는 이것이 악법이 아니라고 하고, 다른 이는 악법이라고 한다. 하여간 이러한 논란의 여지가 강한 법이, 합법적 절차를 유린하고 국회에서 불법적으로 상정, 통과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정, 통과된 것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권한쟁의 심의에서, [ 이미 통과된 법률에 대한 헌법적 차원에서의 적법성 여부를 심사하는 국가최고기구인]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우리에게 주었다>: 

헌재 미디어법 관련 결정문 전문 

(이 중 가장 중요한 6. 각 법률안 무효확인청구에 대한 판단 - 을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그런데 - 

"비록 통과 절차가 불법적, 위헌적이었지만, 그 처리된 것의 처리는 국회에 맡겨야 한다" (이강국, 이공현, 김종대 등의 [판결이라기보다는] <주장>)  - 이런 말을 한 이들을 접하매, 우리의 뇌리에 떠오르는 첫번째 형용어는 바로 <비겁한>이다. 첫번째 명사는 다름 아닌 <비겁>이다. 눈치를 보며, 해야 할 말을 꼬리에 숨겼으니, 비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비겁함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대로 또 용인되어, 문제 없이 세월에 묻힐 경우, 다음  번 이와 유사한 사태 ( 어떤 악법을 불법적으로 법을 심의, 통과시킨다 -는 끔찍한 사태!)  가 일어날 경우에도 역시 그 불법 행위는 단죄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니 당연하게도, 지금 우리가 목독하는 이 문제는 단지 미디어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 수준에서의 법의 관리> - 라는 보다 심중한 문제라고 봐야 한다.

법을 만드는 일을 하는 이들이 법을 만들고 토론하는 신성한 공간인 국회에서 불법을 저질렀다 - 

그럼 이들의 불법을 어떤 식으로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 이러한 분노어린 끓어오르는 질문을 품고 헌재 결정만을 바라보던 그 모든 이들, 우리들에게, 결국 어제 헌재 [의 일부 판관님]는 "나는 단죄할 능력이 없수다" - 이런 말을 내놓은 것이다.   

그럼, 그들의 불법 행위는 어떤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하나? 

어찌되었든,  다음의 두 판관은, 헌재라는 기이한 곳에도 보편 이성을 지닌 이가 남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며,  <매우 적절한> 판결을 다음과 같이 내려놓았다.

 "재판관 조대현, 송두환의 인용의견

이 사건 신문법안은 위원회의 심사를 거치지 아니하여 국회 본회의에서 질의․토론을 생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안취지 설명이나 질의․토론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표결된 것이므로, 국회의 의결을 국민의 의사로 간주하는 대의효과를 부여하기 위한 실질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신문법안에 대한 국회의 의결은 국민의 의사로 간주될 수 없으므로 무효라고 봄이 상당하다.

더구나 이 사건 신문법안의 경우 질의․토론절차가 생략된 점 외에도, 표결과정이 극도로 무질서하게 진행되어 표결절차의 공정성, 표결결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바, 위의 사유들은 중첩적으로 결합하여 중대한 무효사유를 구성한다.

이처럼 법률안에 대한 국회의 의결이 국회의원들의 심의‧표결권한을 침해한 경우, 그러한 권한침해행위를 제거하기 위하여는 권한침해행위들이 집약된 결과로 이루어진 가결선포행위의 무효를 확인하거나 취소하여야 한다. 가결선포행위의 심의·표결권한 침해를 확인하면서,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모든 국가작용이 헌법질서에 맞추어 행사되도록 통제하여야 하는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기 잘 지적되었듯, 일부 판관의 판결은 결국

"나 헌재 안할래 -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헌재 - 본래 니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강력한 기구 아니거든" -

이것에 다름아니다. 

종합하면 - 

 용산 참사와 헌재 사건을 통해,  정치존엄인으로서의 22세에 이른 우리 한국인은,
 
법을 지키고, 만들고, 집행할 의무를 지닌 국가 기구 혹은 국민의 대표기구가, 되려 거꾸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권력을 입증하기위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한 경우에,

법을 어긴 공인들로부터 제 본디의 의무를 져버린 데 대해 단 한마디의 사과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을 법적인 절차를 통해 
단죄하지도 못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므로, 한국에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적 이념의 실현, 복지국가 이상의 실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거창한 것, 그렇게 멋진 것은 아직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수학을 배우려는 이는 미적분을 배우기 이전에 구구단부터 외어야 하는 것이다!  

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고, 그 법의 준수는 모든 이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 이러한 상식 상의 민주적 법치 기율부터 우리는 우선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기 기율을 공직자가 지키지 않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럴사 그러하다, 한국에 없는 것, 필요한 것은 바로 <준법의 기율>이매, 우선 <준법 사회>부터 만들자. 우선 그 기초를 조금이라도 좋으니 더 튼튼히 하자. <불법, 탈법 사회>에서 벗어나 <준법 사회>로 가자


그렇기는 하나, 그렇기는 하나, <준법 사회> 실현이란, 이번 헌재 사건이 암시하듯, 말처럼 그닥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실현되려면, 양심적인 법률인(법조인)들이 많아져야 하고,  <경종>을 댕댕댕 울리는 판례들이 많이 생산되어, 불법, 탈법에 친근한 이들의 가슴을 놀래켜야 한다. 

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로구나 -
세상에 돈으로 안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법이로구나 -

이러한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돈장난에 능한 이들이, 제 삶의 실존의 마당에서 자각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법률 이해의 간이화> 혹은 <대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을 통해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법을 어긴 이 공공 기구들이 그렇게 하고서도 버젓이 잘 지낼 수 있는 사태가 존속할 수 있는 배경에는 <관료적 권위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하나의 무형의 힘으로서 사회 내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강철같이 강고하고 뱀처럼 사악한, 그리하여 <철뱀>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러한 권위주의는 저 위의 권위적 문구와 어조로 점철된 판결문이 잘 보여준다.

모든 법을 좀 더 쉽게 고칠 수 없는가 -

이러한 질문이 정치에 <관심하는>, 정치에 <조르게하는> 그 모두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

<법률 용어의 이해간이화> - 라는 사회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바탕 위에서 법조항들의 대대적인 개정작업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목적은, <일정한 교양>을 지닌 <보다 많은 다수>가 삶에 필요한 법률안을 그 언제든 열람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이 사람이, 헌재 사건을 살펴보며,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한국사회가 갖추어야 할 제 2의 기초다.
 

*포스트스크립: 이번 사건으로 인해 보다 많은 이들이 법과 법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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