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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 뽕띠 저, 류의근 역 [지각의 현상학]

by 유동나무 2010. 1. 4.


 

현상학을 여러 철학 분과 중, 혹은 여러 철학적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현상학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현상학은 [지각의 현상학]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 그러니까 독일에서 출발한 현상학은 메를로 뽕띠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메를로 뽕띠의 이 저작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로부터 조금 영향을 받았긴 하다. 메를로 뽕띠의 저작은 많지만, 핵심적인 저작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더불어 바로 이 작품 [지각의 현상학]이다. 



그런데, 이 책이 다행히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다. 불행인 것은,
역자가 터무니 없이도 또 한심하게도 책을 어렵게 번역해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너무 어려운 한국어로 적어놓았다. 이것은 그리고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니, 불어를 모르는 한국인은, 이 류의근 씨 덕택으로, 이 번역본에, 기가 질리고 만다. 읽으면서, 이거 나는 이 책을 이해 못하겠다, 류의근 같이 머리가 더 좋은 종자가 세계에 있나보다, 철학이란 그런 종자만이 하는 것인가 보다, 이런 지레짐작으로, 물러서고 마는 것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몇몇 불어로 읽었거나 혹은 읽었다고 착각하거나,
어려운 한국어를 읽어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이들은 모여, "우리끼리의 메를로 뽕띠"라는 하나의 테두리를 형성한다. 이 테두리 바깥의 모든 사람들은 이 테두리 속에서 형성된 고압적 담론, 끼리 담론, 이해 불가능한 담론으로 말미암아, 메를로 뽕띠와는, 현상학과는 더욱 멀어진다. 물론 이 세계에 태어난 모두가 현상학자가 되거나 현상학을 알거나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 태어난 모두는 지각의 현상학적 세계 속에서 남과 나의 관계됨을 생각해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우리 모두를 위한 철학이다. 철학은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것인데, "우리끼리의 철학"이 철학을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끼리의 철학"은 심지어 그 "우리끼리"라는 그룹에 가담한 이들도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철학은 "아는 체"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철학은 이와는 정반대의 태도로부터 시작되고 유지되고 형성되고 진척된다.



해결을 위한 방편은 있다. 우선 철학자들, 철학서의 번역자들이 신조어를 가급적 짓지 않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신조어를 만들 수밖에 없다면, 매우 신중하게, 여러 사람에게 자문을 거쳐, 대중들이 자기들의 용어로 나중에 사용할 수도 있는 용어로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문법 구조에 맞는 문장만을 쓰되, 류의근 씨가 한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 즉 문장을 쓸데없이 교묘하고 어렵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설사, 만연체의 장문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하더라도, [거듭 읽는다면 종내는] 이해가능한 한국어의 꼴로 이 장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물론 간단명료한 말, 그러한 문장의 사용이 천의무봉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섬려한 사유는 섬려한 문장으로밖에는 구현되지 못한다. 사유와 언어는 분리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섬려는 "아는 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20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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