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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로 살기

by 유동나무 2009. 12. 23.

 

있음직한 바람직한 나로 나를 대치하는 것이 문제다. 있음좋은 내가 남에게 보여져야 하겠기에, 그 모습을 실현하고 있을지 모를 남을 둘러 참조하려 하지만, 그러한 바람직한 모습을 그이가 보여준다 한들, 그것 역시 그이의 참 모습이 아니라 그이가 만들어낸 그이의 바람직한, 있음좋은 모습일 공산이 크다. 이러한 가면극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하면 좋을까.

 

나는 내가 버렸으면 하는 나의 모습을 지우지 않음으로써만, 다시 말하여 모자란 나에게 내가 인정됨으로써만, 또 거꾸로 내가 모자란 나를 인정함으로써만, 나는 있음좋은 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두 헛된 가면놀이일 뿐이다.

 

그럼 모자란 나는 무엇이며 또 그냥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그냥 “나”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유영모 선생을 따라 呂 라 부르면 좋으리라. 이것은 유영모 선생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인간 바탕 뿌리에 깃들어 있는 하늘바탕인 淸淨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 모자란 나는 지금 바로 이 청정심과 딱 달라붙어야 한다. 청정심은 이 모자란 나를 저와 한 몸으로 꽁꽁 묶어야 한다. 呂의 숙주, 呂의 주소는 지금의 나다.

 

우리는 마음이 비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빔으로써가 아니라 죽음으로써 청정심으로 살아나고, 또 우리가 거리낌이 없다고 느낄 때의 그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呂다. 우리가 呂 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본래심이다. 다시 말해 마음 죽어 呂로 살기. 

200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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