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석영 산문

물에게 준 소리 (7) 나무 안는 사람

by 유동나무 2011. 6. 5.


 

찰스 다윈은 32 되던 해에 다운 하우스를 구입하고

해부터 은둔자-연구자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은둔자-연구자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를 이러한 유형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기둥은

그의 부유한 가계

그의 지적 실력과 의지  

그의 병이었다.

다윈은 자신의 집이자 연구실인 다운 하우스에 칩거하며

매일 샌드 워크Sand Walk (모래 산책로) 걸었다.

매일 콩코드의 자연이 허락하는 소로를 홀로 걸었던

자연과의 대화에 미쳤던 현자

소로처럼

역시 홀로 하는 소요 산보를 즐겼다.

생각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에게

소요는 여기가 아니다.

그이에게 소요는 다른 것과 바꿀 없는 시간이요,

다른 것과 바꿀 없는 애인이다.

 

 

다윈처럼

소로처럼

생각을 만나기 위해

또는 생각에 묶이기 위해

생각의 소에 들어가기 위해

생각에 물들기 위해

생각의 입김을 만나기 위해

물론 그러한 마음만은 아니지만  

아침에 나서본다.

어김이 없이

나서본다.

새벽이 죽는 시간이면 지저귀는 새들.

이들은 단지 새벽의 죽음을 찬미하는 망령된 이들만은 아니다.  

이들은 아침 소요를 재촉하는 명랑한 재촉의 화신들이기도 하느니.

 

다윈에게도 샌드 워크에 터닝 포인트, 회귀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발로 찍은 다음 다시 바퀴 돌게 하는 기준점이다.

아침 산보행이 여러 되다 보니 

기준점이 생겼다.

나무 그루다.

조용한 나무.

그러나 낮고 뿌리가 땅에 드러나 있는 나무.

가지가 좋은 나무.  

좋은 하늘 그림을 보여주는 나무.

 

나무 그루는 생각을 준다.

20 후반 일산에 거주할 무렵 하던 산보에도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는 것을

그곳에 나무가 있었다는 것을

그곳에 있던 나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때 나무를

남몰래 안곤 했다.

남이 보면 남세스러워 남이 때만

몰래 안고는 했다.

이른바 트리 허거tree-hugger.

나무 포옹자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무를 포옹하면

마음이 편안했다.

마음이 따스해졌다.

마음이 둥글어졌다.

따뜻한 알처럼

온원 되었다.

그때 내 정신적 어머니는

그 나무였는지도.

정신적 애인은

그 나무였는지도.

 

이제 세월은 흘러 다른 곳에 있지만

이 소요로의 끝점 또는 회귀점에

포옹하고픈 나무가 생겼다.

이른바 새 애인이다.

 

애인은 어떻게 생기나?

그 사람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경우,

그 사람에게만 유독 끌리는 경우,

그러나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경우,

그 사람이 내게도 끌리는 경우,

그럴 때 그 사람과 나는 우리도 모르는 힘에 의해

묶인다.

자연스럽게 나도 모르게 그러나 기쁘게

또 고맙게

묶인다.

하나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다.

 

그처럼

이 눈엔 다른 나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그런진 몰라도

다른 나무는 성에 안 찬다.

마음에 다 안 찬다.

그러나 성에 마음에 다 차는 나무

언제고 다시 찾게 되고

다시 보게 되고

어루만지게 되고

마침내 나도 모르게 포옹하게 되는 나무.

날 매듭되게 하는 나무.

 

기쁘도다

나는야 나무 포옹자.

포옹하며

둥그렇고 따뜻한

알 되는

나무 포옹자.

 

온원은

나무로부터 내려와

몸이 된다.

 

그러나 나만?

아니지, 그대도 나무 포옹자.

그대만 나무 포옹자?

아니지, 그대 옆의 그대도 나무 포옹자.

그러니 우리는 모두 모두 나무 포옹자.

 

나무의 마음을 이리로 가져오고자

나무의 기를 이리로 데려오고자

나무의 마음과 이 마음을 포개고자

나무의 기에 이 기를 겹치고자

그 오름에 이 오름을 바치고자

그 오름에 이 오름을 올리고자

높은 곳으로 오르고자

 

홀로 걷는 아침 길

홀로 만나는 나무 님

높아져 돌아오는 행복 길

 

2011.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