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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물에게 준 소리 (14)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

by 유동나무 2011. 6. 28.



오규원 시인이 말년에, 즉 승천하기 전에 쓴 시편들을 읽었다.

맑다. 고요하다. 정갈하다. 사붓하다. 가분하다.  

그런데도 조탁의 흔적이

또는 고음의 흔적이 없다.

조탁과 고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는 몰라도

쉽게 내려 쓴 느낌이 난다.

말을 잘 골라

골라진 말만 이리저리 음률로 그림으로 직조해놓았는데도

애써 골랐다는 느낌이 거의 나지 않는다.

쉬우면서도 그윽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된 서법[서예] 작품과 비슷한 것이다.

오규원의 시를 선시禪詩라 부를 순 없을지 몰라도

거기엔 모종의 선미禪味가 서려 있다.

일획으로 긋되 꾸미거나 망설이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

이러한 초서草書에는

그 율동감, 역동감 탓에 하는 수 없이 선의 맛이 난다.

꾸미거나 망설인 것의 더러운 맛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으로 다른

깨끗의 맛이 난다.

 


그러나 선은 항상의 선이어야 선이다. 

그래 사역선이라 한다.

행역선, 주역선, 좌역선, 와역선이라 한다.

 


오규원의 시편에 만일 선미의 힘이 있다면

선생의 시편이 우리들 독자의 언어 태도와 능력을 함양케 한다면

우리들 독자의 언술에 가르침을 준다면 

우리들 독자의 언어[사용]법을 충격하는 힘이 있다면

그 선미의 힘을 우리는

일상의 지평으로

항상의 지평으로

우리 자신의 삶으로

가져와야 좋으리.

 


그러면 어쩌면 언역선도 가능하다.

선은 원래 언[] 초월이지만,

초월 안하고 언[] 해도 선에 가까워질 때가 혹여 있을지 모르는 일.

말에 선미가 묻어날지 모르는 일.

 


꼭 맞지는 않지만

이러한 간략진솔직절한 언어법과 관련하여

<주역>에서 참조할 만한 말은 바로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 이란 말이다.

 


인터넷으로 인해

소위 SNS로 인해

우리들은 서로에게

낯설고 눈선 서로에게 

말 건네기 훨씬 쉬어졌다.

말 내뱉기 쉬어졌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겐 말 고르기[修辭]’ 훈련이 요청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해서 그렇지

말하기란

실은

그림 그리기와도 같다.

왜냐하면

말 자체에는 이미 시적 창조성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고

말의 직조/배치 형식은 예술의 한 형식으로 이미 인정받고 있으니까.

 


늘 좋은 그림 그리려고

말에 힘주는 것도

말에 진지함만 실으려 하는 것도

우습고 꼴사납지만

말하는 순간에 그림 그리기의 기회가 늘 주어진다는 진리에 둔감한 것도

우습고 한심하지 않나?

 


숨처럼

말도

하나의 기회.

내가 그대에게

갈 수 있는 기회.

이 감으로

수사입기성할 수 있는 기회.

 

What’s on Your Mind?

이 빈 칸은

이미 하나의 기회.

 

2011.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