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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 산문

물에게 준 소리 (5) 아힘사

by 유동나무 2011. 5. 28.


달려온다
.

무서운 기세로 달려온다.

저쪽 풀밭으로부터 이쪽 풀밭으로, 내가 걷는 쪽으로 달려오는 이것은

다름아닌 마리다.

달려오는 놈은

몸집이 있는 점박이인데

주인은 50-60 여인네다.

달려온 점박이는

기어이는 품에 안긴다.

왜냐하면 내가 녀석을 쓰다듬어 주고 반기어 주었으니까.

세상에 한번도 적이 없는 나를 향해 네가 달려온다는  

세상에 한번도 적이 없는 너를 내가 보자마자

어루만진다는 .

이러한 짧은 만남을 이룩하고자 

저쪽으로부터 이쪽으로 무섭게 달려오는

힘을

아힘사라 불러보고 싶다.

비폭력의 힘이라 불러보고 싶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따져 물을 것이다.

아힘사는 사람의 덕목이고

개한테 그런 붙여주면 되나?

개는 한낱 미물이고

사람은 영체인데

낯선 이를 향한 개의 본능적 끌림과

성숙한 사람이 갖게 되는 고급한 능력인 아힘사가 어찌 등치 있나?

 


그러나
아힘사는 단지 비폭력의 유함이 아니라

비폭력의 유강이다.

비폭력과 폭력을 잡아먹고 놈이 바로

아힘사라는 거물이다.

그리하여 아힘사는 힘이 세다.

기가 세다.

아힘사를 이길 자는 세계에 없다.

아힘사에는 

그러니까 달려오는 개의 기세와 같은 무엇이 필요하다.

달려오는 개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기세와 마음은 분리 불가능한 ,

마음을 믿음이라 해보고 싶다.

 

 

아힘사의 임자는

개가 그런 것처럼

믿음의 임자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

사람이 바로 아힘사의 사람이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갖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키우기는 더욱이 어려운 무엇이다.

왜냐하면

이것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도 어렵고 

이것의 실질을 객관적 잣대로 측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은

이성reason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요,

마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요,

지각perception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몸은 어느 정도 측정도 가능하고

보여주기도 가능하지만,

기실 그렇게 하기 좋은 몸은 죽은 이지

살아 있는 몸에 대해선 여전히 그것이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

몸은 움직이는 운동체요,

숨쉬는 세포결합체,
제 생명의 안팎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모호한 생명체요
,

마음과 분리 불가능한 유기체이므로 그러하다.

하니 실상 실체를 객관적 잣대로 측정하기 어렵고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어려운 것은

믿음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실질이기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사람의 실질을 무가치하다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함부로 믿음 가치나 효용이나 힘을

평가절하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 아닌가.

 


결론
.

사람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

힘이 사람.

그런 사람은 아힘사로 간다.

아힘사 된다.

 


무엇을
믿나?

달려온 개가

믿었던 그것을 믿는다.

지나치게 명민한 , 따지는 이는

(개의) 그것은 믿음 아니라 본능이래도,

이래 말하겠지만,

그것의 이름이 믿음이든 본능이든

그것은 단번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체험에 의해 축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믿음도 사람의 체험에 의해

커져가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을
믿나?

달려온 개는 무엇을 믿었나?

달려온 개는 대체로 체험상 홀로 산책하는 정도 크기의 사람은 자신에게 호의적임

믿고 내게 무작정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무작정, 무서운

단어는 기세의 단호직절함을 말하는 단어다.

그러니까 개는

망설이거나

의심하거나

그런 더러운 없이 그냥 뛰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깨끗한 단호직절이다.

 


사람이
사람의 호의를

만물의 호의를 믿을

사람의 믿음 역시

어쩔 없이 깨끗한 단호직절이다.

그리하여 믿음의 힘은

그것을 목격하는 이를 감화시키고 감동시킨다.

 


그래
(당신의 생각 그대로) 사람은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더러워진 것이지

본래 더러운 것이 아니다.

본래는 청정이다.

믿음의 대상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개와 같이 무서운 기세로 사람에게, 타인에게

달려갈 있는 것이요,

깨끗, 단호, 직절해질 있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청정하고

본래 유약하고

그리하여 본래 폭력을 싫어하고

본래 호의를 좋아한다.

폭력-야만-생존의 세계에 길들여져 어쩔 없이 폭력심을 지니게 되었지만

본래는 유약한 자요, 비폭력 선호자요, 호의 선호자다.

사람의 본성은

여성성이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서 가장 보이는 성질이다.

여성성은 그리하여 사람의 본향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여성성으로 올라가야한다.

 


그러나
여성성, 유약성의 가치는

흔히 그러하듯,

결코 평가절하되어서도 안되고

무시되어서도 된다.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는커녕

거꾸로 찬미와 추구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
강한 사내처럼) 강해지고 싶다

이러한 마음은

유약성의 임자, 여성성의 임자가

폭력의 세계, 강고의 세계, 야만의 세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나은 삶을 위해

어쩔 없이 가지게 되는 말이지만,

기실 좋은 말이 아니다.

측은지심을 자아내는 말이지만,

말은 결코 우리의 이상을 지시하는 말이 없다.

 


도리어
우리는 말을 버리고

유순해지고 싶다 말로 귀순해야 한다.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가야 한다. (도피안)

말이 싫다면

우리는 유강해지고 싶다 말에게라도 귀순해야 한다.

최고의 좋음은

유순이요

최고의 좋음은

유강이다.

최고의 좋음은

높은 어린이의 기세다.

정신의 힘이 어린이다.

관용하고

포용하고

수용하는 높은 어린이다.

이것을

인도의 현자는 아힘사라 불렀다.

 

 

2011.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