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프레시안에 올라온 글입니다. 일단 일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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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씨에 대한 압력과 탄압을 중단하라!
미학자이자 사회비평가로서 대한민국의 지식계에 소중한 역할을 해왔던 진중권 씨가 현재 곤경에 처해있다. 그가 미학 연구자로서 관계해왔던 공립, 사립 대학교에서 연달아 그의 자리가 사라졌다. 또 그는 지금 여섯 개에 달하는 재판과 소송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밖에도 소득세 납부 등의 이유로 집요한 감사를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진중권 씨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여 보지 않는다. 또 특정한 이념적 노선의 지식인들에 대한 사회적 탄압의 차원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사태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독립적 지식인 그리고 공공적 지식인이 설 자리가 존재하는가라고 하는 더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 사태는 독립적 지식인의 위기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상상력과 비판과 제안에 관한 한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되었을 때에 비로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무제한의 자유를 실현함에 있어서 권력이나 자본 나아가 대학이나 학제와 같은 일체의 제도적 배경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지적 작업을 수행해나가는 독립적 지식인의 존재는 그래서 민주사회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존재이다.
또 이 사태는 공공적 지식인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늘날의 제도화된 지식계는 갈수록 전문적인 세분화를 겪고 있으며 그 생산물은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힘들게 암호화되어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분절화된 전문 분야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가 당면한 문제들과 대면하여 이를 공공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공적 지식인의 존재가 또한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이다. 이들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탈을 쓴 엘리트 지배나 중우 정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진중권 씨는 지난 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척박한 한국의 지적 토양에서 이 두 가지 역할을 몸소 구현한 이이다. 그는 권력이나 자본은 물론 좁은 의미에서의 대학이나 학제와 같은 제도에 의존하거나 구애받지 않은 채 자신의 독특한 논지와 주장을 벼려온 이로서 널리 인정받아 왔다. 또 특정 분야의 전문성에 갇히지 않고 제도적 지식인들이 기피하는 예민하고 어지러운 논쟁 구도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사회 전체의 소통과 공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위치는 그가 내놓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과 그 각각이 거두어온 놀라운 대중적 성공이 여실히 증명한다.
지난 몇 개월간 이 사회의 각종 권력 제도는 자신들이 이러한 독립적 지식인 그리고 공공적 지식인을 얼마나 기피하고 위험시하는지를 스스로 폭로하였다. 한마디로 비열하고 치사하다고 밖에 달리 말을 찾지 못하겠다.
비열하다. 어느 하나의 기관이나 제도도 아니다. 어느 하나의 사유와 명분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 기관에서 공립 대학, 사립대학에 이르는 지식계의 다양한 "기존 권력"이 다양한 이유를 들면서 공모라도 한 듯 똑같은 행동의 보조를 맞추고 있다.
치사하다. 그의 자리를 빼앗으며 내건 이유들, 명분들이라는 것이 참으로 안쓰러운 것들이다. 진중권 씨가 학위가 없다거나 다른 기관에 직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도대체 지난 몇 개월간 새로 발생한 사유인가? 어째서 지난 몇 년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 이 몇 개월 사이에 한꺼번에 문제가 된단 말인가?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제도나 권력에 기댈 곳을 마련하지 못한 지식인이란 실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취약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진중권 씨와 같이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얻고 있는 지식인도 이럴진대 그조차 갖지 못한 이들은 이 사회에서 과연 권력, 자본, 대학에 어서 빨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렬종대로 늘어서는 것 이외에 다른 지적 작업을 할 용기를 감히 낼 수 있을까?
또 민주사회의 주인인 공공 대중의 의식을 풍부하게 하고 소통시키기 위한 작업에 과연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진중권 씨를 지켜내는 일이 진중권 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작업하고 사유하는 지식인들 일반을 보호하기 위한 공공성을 가진 일이라고 믿기에 이렇게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우리는 야유한다. 힘없고 가진 것 없어도 그저 지적 자유를 만끽하고 이웃과 공유하는 것 하나를 인생의 기쁨이자 소명으로 여기는 지식인들에게 이 사회의 기성 권력이 돌려준 대접에 대해서. 또 우리는 충고한다. 국민의 태반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자적 사유와 토론 능력을 가진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지식 사회의 대세를 행여 몇 가지의 알량한 제도적 권력을 휘둘러서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는 낡은 생각을 포기할 것을.
진중권 씨에 대한 유형무형의 압력과 탄압을 중지하라. 우리 인문사회과학 저자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 단단하게 기둥을 박은 공공장의 담론의 힘을 믿으며, 우리의 독자들 그리고 공공 대중과 함께 연대하여 진중권 씨를 지키고 지식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교수), 고종석(<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우석훈(<88만 원 세대> 저자·연세대 강사), 홍기빈(<거대한 전환> 역자·국제정치경제칼럼니스트) 이상 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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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마디:
1) 위에 밑줄 그은 부분은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아마도, 우석훈 씨나 홍기빈 씨가 작성했을 터인데요 - 글 이렇게 쓰고 자칭 지식인이라 하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지식인이란 무엇입니까. 많이 배우고, 그 배운 바를 대중의 삶을 위해 말글로 헌신봉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식인, 지식분자가 헌신봉공하는 길은 말글을 통하는 길이기에, 그들은 말글에 능통해야 합니다. 그이의 학력/직업과 상관없이 이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말글에 서툰 이는 지식분자 대열에 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왜 말글에 서툼에도 자신이 말글에 서툴지 않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글에 서툰 이들이 출판사/저널에서 편집자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위 분들, 그리고 진중권 씨는 공공적, 독립적 지식인인가요? 진중권 씨가 대중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한 독립적 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인가요?
오히려 진중권 씨는 명망가-지식인, 으스대는-저 잘난 맛에 사는 지식인-저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숱한 독립적 지식인들이 아니라 명망가-독립 지식인들이 나서서 (아마도 그와 유사한 정체성을 지닌 우석훈 씨 등에 의해 발의되어) 성명을 발표한 것이 아닌가요?
이 글이 올라간 프레시안도 그렇고, 이 명망가-저자-지식인들<이야말로> 일종의 권력집단 아닌가요? 그들이 권력의 위험성 운운할 수 있나요?
저는 요새 <저자의 죽음과 블로거의 탄생>을 테마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출판을 통해 이름을 세운 이들은, 저자가 된 이들은 이제 모두 블로거로 신분하강을 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지 않나요? 아니 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저자-근대의 시대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3) 진중권 씨가 지식인인가요?
앞서 저는 지식인이 많이 배워 대중을 위해 말글로 헌신봉공하는 이라 말했는데요, 많이 배워 말글 잘 구사해 헌신봉공하면 과연 지식인인가요?
말글을 배운다는 것과 말글을 배워 공공적인 장소에서 그 배운 바를 언설로 드러내보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요? 후자의 경우, 공공 장소에서 실현된 언설은 그 언설을 실현한 이의 인격적 존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설사 그것이 사실에 바탕한 간단한 증언이라 할지라도, 그 언설에는 그 언설을 한 이의 존재가 묻어나지 않을까요?
따라서 공공장소에 말글을 하는 이라면 늘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한다는 것은 곧 명망을 얻는 길, 즉 인기몰이에는 별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기몰이를 하려면, 이와는 정반대로, 치고 나가야 하지요. 욕도 하고, 깜짝 놀래키기도 하고, 박학을 뽐내며, 현란한 언어구사, 개념어 구사를 보여주며 (여기에 유럽과 미국이라는 <현장> 체험 역사가 가미되면 더더욱 좋습니다. 사실 진중권 씨는 말글에 능통한 사람이고, 현장 체험 역사도 있죠) 대중/청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지, 조심하는 것이 관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타르시스를 제공함으로써 <지식사회의 오빠>가 되려는 욕망과, 학문한다는 것, 그 배운 바를 <모두의 삶>에 바치려고 애쓴다는 것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요?
저는 공공장소에서 언설하는 것이 주 삶의 임무인 지식분자의 근본요건이 말글에 조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조심함> 가운데에서 자신의 인격을 수양/수련하는 것이 지식인됨의 근본적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이가 그 입을 열어 진리와 정의를 이야기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말의 내용만 그럴 듯하면, 청중들에게 <기쁘게>하면 그게 다인가요? (히틀러는 말의 대가였지요. 그리하여 청중들이 그를 투표로 뽑은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이의 태도나 어조에서 드러나는 인격됨이 그 말의 내용과 조금 엇나가도, 그 말이 진리와 정의를 잘 말하고 있는 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나요? 그 말글이 어떤 특정한 이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가한다 해도, 그 말글이 진리와 정의를 잘 전달하고 있는 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나요?
우리는 명망가-지식인-스타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아 왔나요? 그들을 통해 지식인됨이라는 우리의 상은 어떻게 형성되어져 왔나요? 그들처럼, 오빠/형님-저자-지식인 스타가 되려는 욕망은 얼마나 가, 笑, 로운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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