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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艸 – 어린 시절 초목이 가르쳐준 것

by 유동나무 2011. 4. 3.

 

(Cao/) Grass, Herbe, Gras, Erba, Césped,  

이것은 풀의 모양을 그린 그림 글자라 해석된다. 풀과 나무. 이 둘을 합쳐, 우리는 초목草木이라고 부른다. 초목은 자연의 일점이요, 자연의 상징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인간은 자연의 어무이가 아니요, 자연이 인간의 어무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요, 인간이 자연에 귀속된 것이다. 자연은 그 신비한 힘으로 인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보듬어주고 있고, 인간은 자연의 무언無言한 운행에서 한 없는 가르침을 얻는다. 인간의 자연 정복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을 보듬어주는 거대한 힘은 분명 자연에 있다.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 힘은 자연에 계시되어 있다. 초목에 계시되어 있다. 초목은 인간을 보듬어주는 거대한 힘의 계시 터다 


아침에 일어나 여명黎明 속에 있는 초목에 코 끝을 갖다 대어 보면, 어제의 번민, 어제의 생각의 임자였던 나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초목 앞에 있는 나, 나도 나 알 수 없는, 생기生氣로 충만한 한 생명체로서의 나, 싱싱하고 기운 찬 몸얼로서의 나만이 오롯이 느껴진다. 이러한 나는, 생명력을 하나 그득 분출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초목의 밝고 맑은 기운과 그 무, 그 뚝함과 거의 대등한 기운과 가치를 몸에 지닌 나인 것이다. 이것을 홀연 내게 일깨워주는 것은 내 몸 안의 나의 의식이나 생각이 아니요, 오히려 내 몸 바깥에 있는 아침의 초목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초목의 힘에 압도된 것이요, 이 초목의 기운을 알아챈 것이요, 이 초목의 존재에 감화된 것이요, 그리하여 그 향기에 물든 것이다.



거짓이 없고
, 꾸밈이 없고, 변명할 필요가 없고,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이 당당하고 맑고 푸릇푸릇한 존재는 지금의 나를 단박에 어린 시절의 나로 돌려놓으며, 나로 하여금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초목은 나에게 어린 시절을 그리고 몽상하게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어디에 있었나? 어린 시절 나는 분명 무위無爲의 자유 속에 있었고 초목과 더불어, 초목의 품 안에서 그렇게 있었다. 그때 나는 인간의 일점이기에 앞서 분명히 자연의 일점, 우주의 일점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이 없으면 진정한 우주성도 없다.” 이렇게 말한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였다. 인간의 어린 시절은 우주적인 시절이요, 인간의 우주성이 인간의 존재에 꽉 들어차 있는 시절이다. 바로 그러했기에, 초목 아래 어린 내가 서 있었을 때, 나의 벗, 나의 스승, 나의 어무이로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 초목의 숨결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바로 우주 자체였다. 바로 그러했기에, 어린 나는 그때 그토록 오랫동안 홀로 초목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지구에서 광합성이 처음 시작된 것은 약 30억년 전이며, 지구에서 나무가 처음 나타난 것은 약 3 7천만년 전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초목에게서, 내 몸 안에도 와 있는 우주의 향기를 맡았음이 분명하다. 가갸거겨 이전에 구구단 이전에 내가 알고 배운 것은, 초목은 우주의 일점으로서 이 세계를 찬미하며 이 세계에 의연히 존재하고 있고, 그 초목의 터질 듯 꽉찬 생기는 바로 우주의 생기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 초목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힘, 그 기운에 의해 탄생된 존재, 그 힘, 그 기운의 일점이라는 것이었다. 초목과의 무언의 대화 속에서 어린 나는 분명 그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 배움과 더불어
, 그 배움의 순간에, 나와 초목 사이의 뚜렷한 경계는 없었다. 그 순간은 내가 초목이요, 초목은 나였다. 풀잎은 나였고 나는 풀잎이었다. 포도나무는 나였고 나는 포도나무였다. 감나무는 나였고 나는 감나무였다. 바로 오늘 아침처럼. 나는 때(시간)라는 때(더러움)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언어라는 때를 모르는 존재, 도덕이라는 때를 초월한 존재였다. 시간 이전의 근본 시간, 언어 이전의 근본 언어, 도덕 이전의 근본 도덕은 초목 속에, 내 안에 이미 다 있었다.



오늘 아침의 초목은 어린 시절 내가 만났던 그 초목과 다른 초목이 아닌즉
,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의 나와 다른 내가 아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생명의 하나됨, 내 존재의 우주성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던,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앎인 그러한 앎에 관하여 무언지교無言之敎를 베풀어 주었던 초목은 오늘 아침 또 나에게 다가와 큰 가르침을 혜시해 주었다. 네 존재의 에센스는 바로 법식法式을 모르는 자유요, 허식虛式이 없는 자연이다. 바로 지금 그대로의 마음이 너의 본체다. 너에게 있는 그대로의 것, 바로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바로 지금 그렇게 생각한 순간의 네가 바로 너의 본체다. 다른 것을 찾지 마라. 너는 이미 완성된 존재다. 너는 바로 그러한 너 자신으로 있어라. 오늘 아침 초목의 가지 끝에 나의 코끝을 가져다 대었을 때, 나는 이러한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 목소리는 그러나 과연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그것은 과연 초목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초목보다 훨씬 더 고귀한 어떤 존재로부터 온 것인가? 그러나 만일 그러한 존재가 정녕 실재한다면, 초목은 그 존재의 일점이요, 그 존재가 자신을 계시하는 곳인 계시 터일 것이다. 그 존재는 푸른 것, 어린 것에 자신을 계시한다. 어린이, 얼인 이는 그 존재의 계시 터다.        





*

이것은 브리즈번 뉴마켓에 살 때 새벽에서 아침으로 가는 시간에 뒷뜰에 나가 백일홍 꽃나무에 그 앞의 여러 풀에 코끝을 가져다 대보고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적어본 글이다. 어린 시절 기거하던 방문을 열면 바로 왼편에 보이던 꽃나무는 자도나무, 포도나무였다. 뉴마켓 집의 뒷뜰에서 다시 어린이가 되어 초목을 바라볼 때 다시금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로 그 자도나무, 포도나무였다. 그 나무들의 그늘이었다.

머릿속에 먼저 적은 글을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 일기 노트에 옮겨 적었다.
이 일기를 출판해주겠다는 고마운 출판사가 있어 이걸 다시 워드로 타이핑해 출판사에 건네어 주었다.  

(<낱말의 우주: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궁리, 2011) 685-6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