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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술 권하는 사회 - 酒

by 유동나무 2010.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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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술이 숙성되도록 담아놓은 두루미()를 그린 것이라 한다. 이 두루미[]에서 익은 것이 물[]과 같이 액체가 되었다 해서 인지, 이 두루미[]에서 익은 기장을 물[]에 탄 것이라 하여 인지는 확실치 않다.

 

세인 중에서 이 를 좋아하는 이는 퍽이나 많아서 주론酒論 역시 그에 합당하게 많다. 술은 좋은 것이다, 아니다 나쁜 것이다, 왜 좋은 것이냐, 왜 나쁜 것이냐, 하는 호오론은 이것은 예술이다, 아니다, 이것은 아름답다, 아니다 하는 담론만큼이나 분분하다.

 


이것에 관한 호론의 주창자든
, 오론의 지지자든, 함께 동의할 수 있는 한가지는 이것의 원료가 곡식이나 과실이라는 것, 또 이것은 오래도록 음식의 일종이었고 여전히 음식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단꿀맛을 찾는 이라면 백이면 백 필경 주육酒肉의 애호가일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나 육 그 자체를 꺼릴 것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꺼릴 것은 주탐酒貪, 육탐肉貪이지 나 육이 아니며, 도리어 거꾸로 예로부터 나 육은 제삿상에 올리는 품목들 중 필수적인 품목들로서 귀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주과포혜酒果脯醯라고 불리는 것은 술과 과실과 포와 식혜로, 간소히 차린 제물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가장 간소하게 차려도 는 제삿상에 올려야 하는 것으로, 고기보다도 더 중시되던 것이 틀림없다. 요컨대 는 귀한 시간, 귀한 이를 위해 아끼어 두었다 마시고 또 내어드리는 종류의 귀한 음식이었다. 모르긴 모르되, 이것은 애끼고 애끼며 모종의 공경심, 경모감과 더불어 마시는 것이지, 틑면 나오는 수돗물마냥 받는 대로 족족 배가 찰 만큼, ‘고가골나인 양 마시는 무엇이 아니리라.

 


그러나 주도
酒道 없이 벌걱벌걱 수돗물인양, '고가골나'인양 음주飮酒하는 이는 예로부터 심심치 않게 많았나 보다. 술 마시고 취해 머리가락 헝크러진 이를 보고 모라 하며, 술 마시고 흉측하게 언행하는 이를 보고 후라 하며, 술 마시고 귀신과 같은 몰골을 한 이를 보고 추라 하니 말이다.

 


어 취한다
, 할 때의 취는 바로 이 모, , 를 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적당히 마신 상태에서 이성 혹은 정신이 어느 정도 몽롱해지고 감성 혹은 마음이 어느 정도 흥건해지는 상태를 일컫는다. 취취醉趣는 술 마시는 가운데 느끼는 흥취인데, 적절한 취취에 머물며 거기에서 노니는 경지는, 술을 좋아하는 이, 좋아하게 된 이라면 꼭 터득해야 하는 묘법이요, 묘경이리라. 숭산 스님의 스승이셨던 고봉 스님은 별칭이 주고봉일 정도로 애주가였던 분인데, 전언에 따르면, 그 분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맑은 기운을 흐트린 적이 없었다 한다. 중정中正의 취취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품종이나 생산지 따위가 아니라
, 그 청탁의 경험과 관련하여, 혹은 그 참 쓸모의 경험과 관련하여 를 분류할 수도 있다. 그 하나는, 사람을 모, , 에 이르게 하는 술로 사람의 기운을 탁하게 하고 그 언행을 난잡하고 하는 술로, 미주迷酒 혹은 탁주濁酒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종류다. 물론 이는 경계해야 할 바로서의 행태요, 때론 문화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소쾌주
疏快酒라 해봄직한 것으로, 사람의 심정, 심사, 심경 따위를 소활하고 시원하게 트이게 해주는, 또는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술이다. 사실 거개 사람이 를 찾는 것은 마음 틔움을 바라서인데, 마음 틔우려고 마시기 시작한 술이 과해 마음 흐리는 술로 발효되기란, 필자의 경험상,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쾌주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부단한 공부의 결과물이다. 안락선생 소강절이 오훗나절에 마신 술은 공부의 일환이지 공부의 일탈이 아니었다.

 


마지막 종류의 술은 약주
藥酒라 부름직한 것으로, 섭생을 위해 식사에 곁들이는 술이다. 러시아와 같이 추운 겨울이 오래 지속되는 나라 사람들은 독한 증류주를 많이 만들어 마시곤 하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추위로부터 인신人身을 보호하기 위함이니, 이러한 술은 일종의 약주인 것이다. (이 외에 신선이 마시는 술이 있으나, 그 술은 인간 세계의 담론에선 제외! 곡차라 하여 승려들이 마시는 술은 논의 생략!) 

 


술이 과해 독이 된다 하지만
, 이 말은 참이 아니다. 우리는 차라리, 어떤 음식이고 과하면 독이 된다, 고 말해야 한다. 심지어 조차도 그러하다. 그것을 어떤 술로 부르든, 사람은 술이라 불리는 것을 저의 얼을, 저의 몸을 이롭게 하려고 마시는 것이지 해롭게 하려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함에도 저의 얼과 몸에 해를 끼칠 정도로 (즉 독이 될 정도로) 마시어대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것은, 이것이 사람을 감정의 동물, 감성의 동물로 쉬이 환원시켜 사람을 이성과 규율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신이한 힘을 지닌 음료이기 때문이리라. 어떨 때, 어떤 사람에게는 제 얼과 제 몸의 건강보다, 이성과 규율의 속박으로부터, 이성과 규율로 조직된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즉 감성적 존재로서, 자신의 감성을 오올히 그 실체 그대로 느껴보는 일이, 그것과 모순되지 않는 존재로서 가만 있어보는 일이, 더 소중하고 다급한 존재의 과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이는 결국
藥酒를 제외한 대개의 경우에, 술이라고 하는 것은, 불평不平하고 불안不安하여 마시게 되는 것이며 평과 안을 찾아가려고 마시게 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나아가, 거짓말을 강요하고, 도구적 이성이 만연하고,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대-타인 관계가 상시적이며, 감성 그대로의 솔직한 표현이 도덕과 규율에 의해 억압되는 현대의 사회 공간의 딱딱함이 사람이 본디 추구하고 좋아하고 갈망하는 안의 부드러움과 근본적으로 어긋짐을 말해준다. 많은 경우, 이 어긋짐이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로 혹은 근본적으로 이 어긋짐은 내 인격과 인성의 부족으로부터 기원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현대 사회 자체, 혹은 그 사회의 특정한 문화적 공기로부터 기원할 수도 있는 것이요, 그리하여 후자의 경우,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사회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회의 실상을 보고 싶은 자여, 밤거리에 나가 보아라. 오늘밤 도회와 읍의 밤거리를 모와 후와 추의 꼴을 한 채 돌아다니고 있는, 살아 있는 밤구신들의 그 흉흉凶凶한 형상들을 보라. 그들의 꼬락서니야말로 당신이 보고 싶은 그 사회의 실상을 비추어주는 분명한 한 거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