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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수목인간 개정판

수목인간 개정판의 한 토막: 의자 이야기

by 유동나무 2022. 9. 2.

 

윈저 체어

어떤 목재 가구는 태어나 죽어갈 운명인 어느 나무와 어느 인간의 유한한 삶을 초월한 듯했다. 자기의 살을 부지런히 부풀리려 한 어느 나무의 삶과 더 멋진 디자인을 태동시키려는 어느 인간의 정신이 혼효되어 불멸의 분위기를 띠는 가구로 탄생했다. 좋은 사례는 영국과 중국에서 제작된 몇몇 의자들이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좋은 의자를 만드는 것이 고층 건물을 짓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대체 어떤 것이 좋은 의자란 말인가? 영국산인, 잘 만들어진 윈저 체어Windsor chair 앞에 있노라면 수다한 생각이 순식간에 밀려든다. 물푸레나무와 자작나무와 느릅나무의 영령[유령]이 어른거리는 (물푸레나무나 참나무로 둥근 꼴의 등받이를 만들고, 자작나무로 봉을 만들어 끼우고, 느릅나무로 그 좌판을 만든다.) 이 묘한 사물은, 마치 고대의 군자[]처럼 자기만의 기품을 표출한다. 저 나무들의 죽음이 변태해 이 의자의 삶이 되었는데, 그 죽음들을 애달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일으킬 정도의 당당함과 의연함이 이 의자에는 서려 있다. 보는 이의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기에게 다가오라고 은근히 손짓하는 듯한 이 생명력 넘치는 의자의 아름다움은 저 나무들을 베어냈던 인간의 죄업을 잠식하는 듯하다. (물론 나무를 벤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토네트 의자

윈저 체어가 나온 지 1~2세기 지난 후, 미하일 토네트Michael Thonet라는 혁신가가 등장한다. 토네트는 곡목 기법을 개발해 벤트우드 bentwood[곡목] 가구라는 이름의 가구를 최초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너도밤나무로 만든, 가벼우면서도 가냘프고 우아한 곡선으로 이루어졌으며, 튼튼하고 편했던 토네트 의자는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빈의 커피하우스에서 제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까지도 당시의 형태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윈저 체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끈하고 깔밋한 데다 실용성마저 우수하다. 하지만 공장에서 증기를 이용해 나무를 구부리고 다량으로 찍어낸 이 토네트 의자에는 뭔가가 빠져 있다. 윈저 체어가 은은히 발산하는 중후한 기품 말이다. 그러나 그 기품은 인간의 기품을 닮은 나무의 기품 같은 것은 아니다. 그건 장인의 디자인 감각에서 우러나온 기품, 즉 장인이 만든 무언가도 아니다. 장인에게 자신의 몸과 생명을 허락하고 생명 없는 물질로 변신했으되, 생명체였을 때의 색채와 질감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 자체의 기품이, 하나의 시선이 되어 우리의 시선에 엉겨붙는다. 어떤 불멸은 시선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권의

윈저 체어가 마음에 든다면, 명 왕조의 가구 장인들이 만든 권의[圈椅, 圓椅, 둥근 의자, horseshoe-back chairs]에도 앉아봐야 한다. 같은 크기의 작은 기둥을 둥글게 이어 등받이로 만든 윈저 체어와는 달리, 이 의자의 등받이를 이루는 기둥은 더 적고 아담해서 특유의 단순미를 구축한다. 팔을 걸치기에도 오래 앉기에도 윈저 체어가 훨씬 더 편해 보이지만, 중국 자단목[降香黄檀 Chinese rosewood]의 웅숭깊은 자색과 단출하고 안정적인 형태미가 만나 이루는 권의의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과 그 분위기 앞에서 윈저 체어의 기품은 오히려 초라해 보일 정도이다. 이 의자는 마치 윈저 체어와 토네트 의자의 장점만을 추출해 그것을 합성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하지만 이들보다 먼저 제작되었다. 어째서 이런 생각들이 저 오래된 중국의 의자 앞에서 몽실몽실 괴어오르는 것일까? 확실한 건, 이 의자를 만든 장인들이 불멸일 무언가를 이 색과 형태로 구축하려고 했다는 부동不動의 사실이다.

 

*우석영 저 <수목인간> 개정판, 2023 예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