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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서경식,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반비, 2019)

by 유동나무 2021. 5. 30.

 

 

 

1. 집으로 가는 KTX 기차 안. 내려갈 때 읽었던 책을 또 펼쳤다. 이 책 <나의 영국 인문 기행>은 묘한 책이다. 오른쪽 면에만 글이 있기 때문이다. 왼쪽 면에는 전부 이미지로 채웠다. 미술 작품이 많아 컬러 인쇄를 했고, 종이도 빳빳한 느낌의 100g 종이. 뒷면 이미지가 비치지 않게 잘 골랐다. 이런 종이엔 HF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 안 된다. HB가 적당하다. HB가 쓸모 있는 이런 종이, 그다지 즐기지는 않지만 컬러 사진 이미지라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2

. <나의 서양 미술 순례>의 문체와 같은, 심부를 파고 드는 진한 감동은 문장에서 찾기 어렵지만, 배우고 새기는 재미가 풍족한 책이랄까. 그러니까 informing 한 면모가 moving 하는 면모보다 강하다. 장소(장소 방문, 여행)를 매개로 장소에 얽힌 작품, 예술가, 예술가의 생애와 곡절 등을 글쓴이는 줄줄이 풀어놓는데 시, 소설, 미술, 연극과 오페라, 음악, 영화 등 장르를 종횡무진한다.

 

3. 덕분에 영국 동해안의 올드버러 Aldeburgh와 영국의 좌파 음악가 벤자민 브리튼을, 그의 소련 음악가 친구 중 하나였던 리흐테르(리히터)를 알게 되었다. 저자 서경식은 리흐테르를 피아니스트라기보다는 나무꾼이나 배관공같은 풍모의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브리튼은 2차 대전 종전 후 올드버러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를 만들었는데 그의 친구 리흐테르도 그의 초청으로 이곳 음악회에 와 연주를 했다.

스탈린 치하 정부를 비롯해 평생 소련을 떠나지 않았던 리흐테르도 만만치 않은 이인이지만, 1930년대 동성애자가 되었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해서 정부의 인정을 (거의 최초로) 받았고, 종전 후 곧장 독일내 나치 수용소로 달려가 위문 공연을 했으며, 올드버러라는 곳을 찾아내소박한, 그래서 값진 음악 페스티벌을 조직했던 브리튼이라는 인물 또한 거장임에 틀림 없다. 음악의 거장이 아니라 인생의 거장인 것이다...

 

4. 저자에 따르면, 브리튼의 명작 <전쟁 레퀴엠>은 라틴어 예배문과 한 시인의 시편을 대조/대위하여 구성한 작품이다. 그 시인은 누구인가? 바로 윌프레드 오언이다. 6악장에서 청중은 오언의 시 <기묘한 만남>을 듣게 된다.

 

지금 인간은 스스로 멸망하는 것에 만족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만족 못하고 피투성이의 분노로 절멸하리라.

인간은 멸망으로 달음박질해 가리라.

호랑이처럼 달려가면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했던 오언이 아마도 전쟁 중 썼을 시이지만, 2차 세계대전 후 핵발전소를 짓고 바다에 온갖 쓰레기를 내버리고 야생의 서식지와 생물을 멸절의 벼랑으로 내몰고 온실가스로 대기권을 그득 채우며 지구와 전쟁을 벌여오다가 코로나라는 소 파국을 맞은 오늘의 인류에게 더 어울리는 시편이다. 그렇긴 하나 같은 시에서 오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넘쳐 흐르는 피가 전차의 바퀴에 핏덩어리를 만들었다면 나는 그 전차에 올라 그것을 달콤한 우물물로 씻어주리라.

그 우물을 아무리 깊게 파야만 한다 해도...

가장 달콤한 우물의 물을.

 

우리도 우물의 물을 파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우물을 누구와 같이 팔 것인가. 그러려면 우리가 1,2차 대전보다도 더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텐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핏덩어리와 귀에 들이지 않는 총탄 소리를 어떻게 보고 들을 것인가...